조석연 교수
조석연 교수
3월이 갖는 의미는 참 큰 것 같다. 봄의 시작. 새 학년의 시작. 새 학기의 시작...

추위에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또는 특별한 환경을 갖추고 싶을 때, 우리는 나만의 정결한 의식 같은 것을 치르곤 한다. 방 안을 새롭게 싹 정리하고 집안 곳곳을 청소한다든지, 산이나 바다와 같은 가벼운 여행을 다녀오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각오를 다진다든지 말이다.

그러한 새로움이 어디 사람에게만 속하겠는가. 겨우 내 말라 비틀어진 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나무줄기이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땅 밖을 향해 꿈틀거리는 모습이야말로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이렇듯 온 만물이 기지개를 펴고 다시 시작하는 계절인 봄이 시작됐다.

이 같은 새로운 시작에 잘 어울리는 악기 하나를 소개한다면 생황(笙簧)을 꼽고 싶다. 생황은 봉황의 날갯짓 하는 모습을 형상화해 박 속에 관을 꽂아 만든 악기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생(笙)`이라고 불리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름을 줄여 `생`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생(笙)`은 `나다`의 `생(生)`자에 관악기를 의미하는 대나무 죽 변(竹)을 넣어 형성된 글자이다. 즉, 이름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생황은 새로움을 뜻하는 악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생황의 탄생 배경은 더욱 의미가 있다. 중국 창세신화에 따르면 여와 여황씨(女皇氏)의 악(樂)에 대한 기록 중 여와가 생황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처음으로 준 악기라는 뜻이다. 중국 진양이 쓴 `악서`에는 여와가 생황을 만들고 음악을 만들어 충악(充樂)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음악이 완성되자 음악으로 천하는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조물주가 처음 인간에게 만들어 준 악기, 바로 그것이 생황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생황의 생김새는 참으로 독특하다. 바가지 안에 뾰쪽 뾰쪽 각기 높이가 다른 대나무 십여 개가 옹기종기 꽂혀 있다. 겉모습은 그러하지만, 사실 이 대나무만을 바가지에서 꺼내 늘어뜨리면 작은 산봉우리 두 개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는 봉황이 날개를 쫙 펼친 형상과 닮아있다. 동양에서 봉황은 음악의 신(樂神)이다. 조물주는 절대 악신으로서 봉황의 원시적 상징을 부여하고 싶어 형상을 본떠 악기를 만들고 이를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러한 생황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삼국시대 이전이다. `수서`의 고구려악에는 생이 기록되어 있고, 백제악에는 생의 한 종류인 `우`가 존재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상원사 범종에서 그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생황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용된 계기로는 고려 예종 때 송나라로부터 유입된 대성아악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선비와 서민계층의 사람들은 생황을 우리화(化)시키는 데 앞장섰다.

연암그룹을 대표로 하는 선비들의 풍류문화 속 생황은 더 이상 낯선 중국의 악기가 아니라 조율을 바꾼 우리 악기로서 우리 음악 속에 융화됐다. 생황의 대중성은 기녀들과 무동의 연주가 실린 조선후기 풍속도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윤복의 `청루소일`, `주유청강`, 김홍도의 `모정풍류`의 그림 속 기녀들이 생황을 접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평소 가까이 하고 있는 악기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김홍도의 `송하취생도`에 나오는 그림 속 주인공들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행색을 하고 있으며 이재관(1783-1837)의 `선동취생도` 역시 주인을 모시고 가는 선동(仙童)이 생황을 불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렇듯 외래악기 생황은 이미 서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생황은 우리의 노력으로 천천히 우리의 악기가 되었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의 슬픈 눈동자와 함께 마음을 울렸던 미묘하고 독특한 음색의 주인공 생황.

봄, 시작, 지금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갖고 있다면, 그곳에 생황 음악을 한 곡 얹어보면 어떨까? 아마도 새로운 시작에 훨씬 더 힘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조석연 대전대학교 H-LAC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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