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다, 날씨가. 차라리 시베리아가 견딜 만 하지 싶다. 문밖으로 나서자 무지막지한 한기가 와락 얼굴이며 몸뚱이로 주먹을 휘두른다. 찢어발기겠다는 듯. 철천지원수와 맞닥뜨리기라도 한 양. 곱은 손으로 티맵을 누른다. 곧 도착한단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아파트입구로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사람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그 흔하던 아이들의 등교길 웃음소리조차 들려 오질 않는다. 10분 남짓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 기다리는 택시는 오질 않는다.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번호를 누른다.

"어디쯤 오고 계세요?"

문제가 생겼단다. 미안하게 되었다며 다른 차를 불러보라고 한다. 오들오들 떨며 아파트 입구에서 지금껏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나 역시 물러서지 않는다. 타고 안 타고를 떠나 사정은 알아야겠다. 그러자 5분 정도 더 기다려줄 수 있느냐는 목소리가 쭈뼛 대며 내 고막으로 기어든다. 기다릴밖에. 얼마 후 기다리던 택시가 내 앞에 멈춰 서고 나를 태우기에 앞서 젊은 여자 손님을 게워낸다.

"죄송합니다, 손님. 문제가 생겨 늦었습니다." "빨리 해결하셨네요." "택시요금 카드 단말기가 고장 났지 뭡니까."

홀라당 다른 손님을 태우고는 차에 문제가 생겨 갈 수 없다며 뻔뻔스레 둘러대고 있겠거니 넘겨짚고 있었는데. 차도 왔고 의심도 풀렸고 몸도 따뜻하고, 그런대로 좋은 아침이다.

`그나저나 수수료가 천원이라니…….`

운전하는 내내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시렁댄다. 그러고 보니 늙수그레한 기사의 손에 영수증 쪼가리가 들려져 있다. 뭐냐고 물으니 이렇단다. 단말기 고장으로 결제를 할 수 없게 된 손님이 현금인출기가 설치된 곳으로 가자고 하고는 현금을 인출했단다. 그리고 수수료 천원을 떼고 택시요금을 계산했단다. 기사에 손에 들려져 있는 종이쪼가리는 수수료 천원을 증명하는 영수증 바로 그것.

"손님 잘못이 아니라 제 잘못인 거야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좀 그러네요."

내가 들어봐도 손님의 요구는 정당하다. 하지만 단말기 고장이 기사 탓도 아니질 않은가. 창문을 연 것도 아닌데 느닷없이 한기가 몰려든다. 백미러에 비친 기사의 얼굴은 한결 처량해 보이는 것이고.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더 이상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차를 몰 뿐. 나 역시 좌석 등받이에 몸을 묻고는 자투리 잠이라도 취할 양 눈을 감는다.

"메-밀 무-욱! 차-압-쌀 떠-억!" 꿈결인가 환청인가, 느닷없이 유년의 낯익은 목소리가 가슴 밑바닥에서 꼼지락대며 몸을 일으킨다. 얼굴에 살짝 미소가 인다. 찹쌀떡을 파는 그 남자는 밤새 그렇듯 떠들며 내 유년의 동네를 배회했다. 커다란 목소리가 작다 여겼음인지 가뜩이나 낮은 창문에 바싹 얼굴을 들이대기도 하면서.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뭐라고 할까? "설마." "말도 안 돼." "그건 심각한 사생활 침해라고요!" 그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말이 되 든 안 되든 내 유년의 그 누구도 정당한 요구 운운하며 찹쌀떡 장사에게 눈을 흘기거나 그를 고발한 이가 없다는 것만큼은 자명하다.

겨울이 다가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찹쌀떡 장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상대방의 처지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정당한 요구`라, 글쎄? 얼음처럼 차가운 권리 앞에 `정당한`이란 수식어를 부여해도 되는 것일까? 문득 생각에 잠긴다.

택시에서 내리자 한층 더 매서운 한기가 나를 맞는다. 춥다. 택시를 타기 전보다 더 춥다. 여기도 꽁꽁 저기도 꽁꽁, `엘사`의 마법에 걸려 얼음 속에 잠긴 `겨울왕국`이 따로 없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발걸음을 옮겨놓는 머릿속이 착잡하다. `마법을 풀어줄 `안나`는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까?` 남호탁 수필가·예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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