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에 따르면 "명종은 이황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자주 그에게 조정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현인을 초빙했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한 후 병풍을 만들고는 그것을 밤낮으로 쳐다보며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박영규, 2014).

조선의 13대 임금인 명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5번이며 별칭은 탐구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욕과 은둔·자신감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탐욕은 지식과 연결되며, 이들에게 인간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열정이 그것을 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적이고 완벽히 신뢰할 만한 대상을 찾는 열정을 보이는데 이것이 자신감이다. 경계가 명확한 사적 공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그는 1534년(중종 29)에 중종과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그보다 열아홉 살 손위의 이복형 인종이 왕위를 승계했으므로 왕권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급서함에 따라 열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 때 시작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그의 나이 스무 살까지 이어졌다.

그의 치세 중 1555년에는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해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를 유린한 이른바 을묘왜변이 발생해 민생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556년(명종 11)에는 재정이 악화되고 더 이상 내어줄 땅이 없게 되자 현직 관리에 대해 수조지(收租地)를 나누어주던 직전법을 폐지해야 할 정도로 부패가 극심했다.

이 외에도 흉년이 계속되고 도적떼가 출몰했으며 특히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는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황해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집중 출몰하는 등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 등 외척과 권신들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해 민생안정을 위한 정상적인 정책을 펼치기 어려웠다.

"1553년에는 경복궁에 불이 나 근정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실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명종은 경복궁 재건에는 유달리 집착해 1년 만에 복구를 마쳤다. 그는 주로 내시들과 주로 어울려 지냈는데, 이들을 번갈아 총애하고 술에 취해서 하옥시키고 국문해, 내시들이 `신하들에게는 성군이면서 우리들에게는 걸주나 다름 없다`고 하였다고 전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명종의 치세에도 즉위 초부터 왕조시대에 자주 나타나는 부정적인 사회현상들이 반복됐으나, 5번 유형이었던 그는 높은 이상을 지닌 신뢰할 만한 대상을 찾아 자신감에 기반한 정신적 교류를 우선시 했다. 따라서 권력욕·재물욕에 눈이 먼 척신·권신들이 국정운영의 동반자가 되기에는 신뢰 수준이 낮았다.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은 그에게는 경계가 명확한 사적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에 재정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빠른 복구가 필요했다.

그가 추구하는 개인적인 이상은 현실정치와 연계된 국가경영을 조망하는데 장애요소가 되기도 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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