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신대륙을 향한 배. 프랑스 과학자 조셉 돔비는 뱃멀미를 견디며 작은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몇 주째 항해 중이었다. 상자 안에는 미국 국무장관 토마스 제퍼슨이 친서까지 써가며 프랑스에 요청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각기 다른 나라로부터 이민 온 국민들이 섞여 살던 미국은 국내 상품거래에 통일된 기준이 시급히 필요했다. 돔비가 국제특급배송 중인 물건이 이 문제를 해결할 예정이었다. 불행히도 이 배는 폭풍에 휘말려 캐러비안 남부까지 떠내려가 해적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인질이 된 돔비는 죽고 물건은 제퍼슨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경매에 붙여져 떠돌았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당시 질량원기의 복제품이었다. 1875년에 있던 미터협약 이전이라 재질도 질량도 지금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킬로그램(㎏)의 기준물이 없는 신생국 미국의 시민들은 유럽 본토에서 살던 대로 파운드 단위를 쓸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관습으로 굳어져 버렸다. 킬로그램 분동이 제시간에 배송만 됐어도 미국도 우리와 같은 단위를 쓰고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프랑스 파리 국제도량형국 지하 금고 안에는 3중 유리로 소중히 보호되는 물건이 있다. 바로 국제킬로그램원기, 1 ㎏의 기준물이다. 만약 우주해적이 질량원기를 훔쳐가 버리면 지구인은 킬로그램을 정확히 잴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백금 90%과 이리듐 10%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원기의 공식 복제본은 여섯 개가 있고, 두 개씩 번갈아가며 십년 주기로 사용한다. 이토록 소중히 아꼈건만 질량원기는 지난 백년간 평균 약 40 마이크로그램(μg. 100만분의 1 그램)씩이나 변했다! 기준이 돼야 할 원기의 질량이 변하고 있다니! 또 하나의 문제점은 기준이 1 ㎏이다보니 그것의 십억 분의 일 크기인 1 μg이나 그 이하로 질량이 작은 물체는 정확히 재기 어렵다는 것, 즉 측정 불확도가 커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첨단과학은 마이크로나 나노 단위에 훨씬 더 관심이 많지 않은가.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질량표준이 인공물에 의존하는 게 문제다. 21세기에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이제 질량표준도 바꿀 때가 됐다고 결의했다. 우주해적이 빼앗아가건, 지구가 두 쪽이 나건, 절대 불변인 기준을 만들자! 바로 이것이 올해 11월에 개정될 단위 재정의의 기본 철학이다. 질량표준은 불변의 물리상수인 플랑크 상수를 활용할 예정이다. 양자역학에서 도입된 플랑크 상수는 빛 에너지와 파장의 관계를 설명하는 숫자다. 이제 질량을 무엇으로 어떻게 재겠다는 것일까? 전통적인 양팔저울과 분동 대신 킬로그램 신정의에 활용될 키블저울은 전기적 일률과 역학적 일률을 비교한다. 상세한 해설이 궁금하신 분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만든 5분 동영상을 감상하시길! (https://youtu.be/KHN_eXJlkD4)

킬로그램 신정의와 키블저울을 활용하면 아주 무거운 것부터 아주 가벼운 것까지도 정확히 질량을 잴 수 있다. 여태껏 속시원하게 정확히 재지 못했던 마이크로, 나아가 나노단위까지도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팔콘헤비 우주선이 발사되는 우주시대가 아닌가? 각국 질량원기는 오년에 한 번씩 파리까지 가져가서 국제도량형국 원기와 비교해 교정하게 돼 있다. 미래의 화성정착민을 위한 질량표준기라 할지라도! 화성에서 파리까지 왕복 운송하는 엄청난 비용은 둘째 치고, 18세기말 미국의 킬로그램 분동처럼 운반 중에 우주해적에게 탈취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킬로그램은 플랑크 상수로 재정의되는 게 월등히 낫다.

킬로그램이 재정의되면 이제 체중계도 바꿔야 할까? 그렇진 않다.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단위 재정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게 아니라 현재 과학기술의 한계까지 정밀해지자는데 목적이 있다. 단위 변천이 곧 측정기술 발전의 역사인 이유다.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양자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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