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반쪽 창으로 세상을 보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게 부족합니다. 온전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제 아내가 스승입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해 대선 경선 후보 시절 한 방송에서 한 말이다. 당시 그는 깔끔한 이미지와 세련된 말투, 소신 있는 철학 등으로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이렇듯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안희정 전 지사가 여비서를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지난 5일 안 전 지사의 수행 비서였던 김지은 씨는 한 종편에 출연해 작년 6월부터 약 8개월간 4차례 성폭행을 당했고, 성추행도 수시로 당했다고 밝혔다. 장소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다. 김 씨는 서울행사와 지난해 7월과 9월 러시아·스위스 등 해외 출장에서 일을 마친 후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성폭력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미투(Mee too) 운동이 한참 사회적인 이슈가 된 지난달 25일 밤에도 안 전 지사가 자신을 불러 "미투를 보면서 너에게 상처가 되는 줄 알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도 성폭행이 있었다고도 했다. 이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고 충격에 빠졌다.

안 전 지사는 김 씨의 폭로가 있던 당일 오전에도 미투 운동 지지발언을 했다. 그는 도청 문예회관에서 열린 `3월 행복한 직원 만남의 날` 행사에서 "최근 확산되고 있는 미투 운동은 남성중심적인 성차별의 문화를 극복하는 과정이고, 우리 사회를 보다 평화롭고 공정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중시하는 척 하면서 여비서를 성폭행한 그의 위선과 뻔뻔함에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안 전 지사는 지난 8년 동안 도지사직을 수행하면서 인권도정을 입에 달고 다녔다. 가는 곳마다 인권을 외쳤고, 만나는 사람마다 양성평등을 주장했다. 조직을 개편해 여성가족정책관실을 신설하는가 하면 도민 인권 신장을 위해 충남인권조례도 제정했다. 지난해 9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인권 패널 토의`에 발표자로 나서 국제인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가 그동안 추진해 온 많은 인권 관련 도정이 진정성에 생채기를 입거나 명분을 잃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치기로 엊그제는 추가 폭로도 이어졌다. 안 전 지사가 설립한 연구소의 한 여직원이 2016년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온 국민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이른바 `386 운동권` 출신의 차세대 정치인 안희정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그를 출당시켰고,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안 전 지사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 글이 빗발치고 있다. 안희정의 트위터 지지자 모임 `팀스틸버드`도 그의 정치 철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며 지지를 철회했다.

충남도도 안 전 지사 흔적지우기에 나섰다. 그동안 도청 홈페이지와 연계 운영됐던 `열린 도지사실` 홈페이지도 문을 닫았다. 또 각 실·국 사무실에 걸려있던 소통, 공정, 투명, 상생 등을 담은 안 전 지사의 도정방침 액자도 떼어졌다.

성폭행 사실이 처음 폭로된 지난 5일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며 잠적했던 안 전 지사가 8일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이른 아침부터 충남도청 1층 로비에는 서울 등 전국에서 몰려든 100여 명의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하지만 회견 시작 2시간 전 돌연 취소 통보가 날아들었다.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검찰에 출석해 수사에 성실하게 협조하는 것이 국민 앞에 속죄드리는 우선적 의무라고 판단했다는 이유를 달았다. 그의 입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늘 소통을 강조하던 안 전 지사였지만 이 날도 인권과 소통은 없었다. 송원섭 충남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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