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운 시인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새 맹위를 떨치던 한겨울 추위가 물러나고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한 내밀한 작업으로 분주한 듯하다. 물론 우리 눈에는 그런 확연한 움직임이 포착되진 않겠지만, 한층 따스해진 햇볕과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결이 봄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탓에 봄이 오기를 더욱 간절히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모 TV 뉴스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가 미투(Me Too)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문화계, 학계, 권력의 계층과 위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서 들불처럼 번지고 지금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남성가해자의 비중이 현저히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성별을 떠나 비열하고 저속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족속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다만 여태껏 들키지 않았을 뿐이고, 설령 탄로 나더라도 쉬쉬하며 상대가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오만함으로 교묘하게 은폐시켜온 결과이다. 끔찍하게 아프고 불편하고 외면하고도 싶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간 수면에 가라앉아 있던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오물들-적폐들이 만천하에 다 드러나 청산되길 바란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의 가치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일까,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존재일까 내심 자괴감마저 든다. 미상불 가해자들은 무고하게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피해자의 입장을 단 한 순간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성적 쾌락의 도구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권력과 지위를 빌미로 삼아 더러운 욕망을 충족시켜온 가해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엄연한 범죄자이다. 상처 받은 이들이 온전히 치유 받고 진정한 사죄와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들에겐 그에 합당한 법적 처벌이 마땅하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그 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리고 이제껏 왔던 수많은 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어쩌면 계절은 어디서 오고 또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현재의 계절이 제 안에 이미 다음 계절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겨울 가고 봄이 오고 봄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겨울 속에서 봄의 싹이 움틀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금 더디더라도 아무도 아프지 않을, 누구도 슬프지 않을 참다운 봄이 우리 삶속에 피어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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