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를 기록한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어린 시절 현종이 불장난하는 것을 본 한 상궁이, `할아버지가 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은 인조반정 때 궁궐이 불에 탄 것을 빗대 인조의 집권을 비야냥댄 것인데, 뒷날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상궁을 불러서 `내가 부왕께 일러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에 차마 중한 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 있었다`며 궁에서 내쫓았으나 계속 식량을 대주었다고 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 대역죄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현종의 따스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현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2번이며 별칭은 `조력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자만과 야심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존경받는, 영향력있고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매우 전략적이다. 그 방법 중 하나로 타인을 보호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준다. 이들이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것에는 대가를 얻기 위한 전략적 시각과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는 1641년(인조 19)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봉림대군(효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그는 1645년(인조 23) 큰 아버지인 소현세자의 급서로 자신의 부친이 세자가 되자 원손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효종 즉위 후 다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59년(효종 10) 부친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효종의 국상에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집권 서인과 남인 세력 사이에 이른바 예송논쟁이 첨예화되면서 당시 정국을 흔들 이슈로 떠올랐지만, 그는 유연한 대처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의 치세에는 즉위 초부터 각종 자연재해로 흉년과 기근이 만연하였고 전염병도 창궐하여 국정운영이 어려울 정도여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출했다. "홍수와 가뭄과 기근이 들지 않은 해가 없으니 내 마음이 기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변이가 겹쳐 나타나는 것을 보아하니 진실로 나의 거친 정치 때문에 하늘의 죄를 얻은 것이다. (현종실록 5년 10월 12일·이덕일 2010>.

그는 국가적인 재난에 상평청 같은 구휼기관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구제에 집중했고 광해군 이후 부분적 시행에 머물러 있던 대동법을 확산하여 민생 안정에 주력했다. 이런 당시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했지만 그는 예외적으로 후궁도 두지 않았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인 왕대비 인선왕후 승하 때의 2차 예송논쟁에서는 15년 전과 다른 주장을 펴는 영의정과 예조판서 등 서인세력 관료들을 몰아내면서 선대왕과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좋은 임금으로 평가받고 싶었던 그는 2번 유형의 특성인 따스한 마음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배려하는 정책에 부심했으며, 때로는 공격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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