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의 시네마수프] 케빈 스페이시
`데이비드 게일`이 생각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케빈 스페이시는 이 영화에서 성폭행의 누명을 쓴 교수로 인생이 파면에 이르는 역할을 연기했었기 때문입니다.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성폭행과 타살로 조작된 자살을 선택하는 동료 여자 교수와 이 조작 된 범죄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무고한 사형범으로 사형에 처하는 상황을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몰락한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사법제도의 허점과 증거로 추정한 진실의 불확실성에 대한 짚어 볼 만한 지점을 제시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고민했던 주연 배우라서 그 실망감이 더 큰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여주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그의 삶의 진실은 그 사건의 피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빛나는 작품들과 그 작품을 함께 만들었던 이들과 작품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상처가 되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러다 한 일간지에 실린 `남녀평등의 시대, 잘못은 꾸짖되 예술은 단죄 말아야`라는 제목의 미투 논란에 대한 인터뷰가 눈에 들어옵니다. 성추행과 성폭력이 남녀평등과 무슨 상관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동성 간의 성폭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남녀가 불평등 한 사회라고 모든 남자들이 성폭행을 일삼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진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줄에 `남자의 성적 욕망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가`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이런 구태의연한 표현들 아직도 재활용 되고 있구나 합니다. 미성년 제자와의 성관계로 치달은 여자의 성적 욕망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나이의 남학생의 피해는 다른 성폭력 여성피해자들 보나 경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미투운동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존경할 만한 것을 할퀴어 가치가 전도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원로의 말씀은 이렇게나 가치에 대한 생각도 다르구나를 확인하게 합니다.
아름다움이 반드시 선(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필자도 사람의 삶에서 예술만한 지극한 위안이 또 어디 있는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인생을 붙들어주는 씨실과 날실에 대해 가족과 친구가 씨실이라며 날실은 예술이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구질구질한 인간성과 한계 진 인간사회를 초월하는 데엔 그 어두움 속에도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끌어안고 치유하는 예술의 힘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폭력에 앞서는 가치가 예술 안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현진 극동대 미디어영상제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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