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22,1-9절은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받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하신다.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창세 12-22장)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탈출 15,25; 1테살 2,4) 아브라함의 인생이 그랬듯 우리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길, 진리, 생명이신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조건과 제한이 없지만, 우리의 그분을 향한 마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시험은 이러한 우리 마음의 정화를 위한 것이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하느님을 내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할 때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된 우리는 길,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성모님과 예수님처럼(루카 1,38; 루카 22,42)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내어맡기며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한다.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인 그 조차 하느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흔들릴 때가 있었다. 그는 하갈을 소실(小室)로 들였으며, 자식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불평을 하기도 하였다(창세 15,2).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족함에도 흔들림 없이 약속을 성취해 나가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했다. 우리도 어려움과 고통이라는 시험을 받기도 한다. 이때 우리는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해야 한다. 이 믿음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의 내용이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사라의 몸에서 기적처럼 얻은 아이였다. 수많은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던(창세 12,1-3)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아이를 받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느님을 믿는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을 때 주님의 천사가 말한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 텅 빈 아브라함 안에 그가 생각하지 못한 더 큰 것들이 차기 시작한다.(창세 22,17-18)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시련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나의 것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의 것으로 차기 시작한다. 나의 역사가 끝나는 그 지점에서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역사 안에서 우리가 예상하거나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더 큰 것들을 우리 안에 채워주기 시작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받은 더 큰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그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갈라 3,7) 이들은 하느님의 조건과 제한이 없는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받치는 아낌없는 사랑으로 응답 한 이들이다.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신 예수님께서는(마태 1,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온전히 받치셨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낮추고, 희생하며 사는 이들은 원수, 최종적으로 죄와 죽음의 성문을 차지해 지배할 것이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될 것이다.

신앙은 자기 비움과 희생이라는 정화와 봉헌의 여정으로서 생명과 구원의 하느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시작되게 해 준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비움과 희생은 크게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회 문제와 윤리적 문제들의 뿌리는 자기 비움과 희생에 대한 거부에 있다. 어느 사회, 어느 공동체이던지 비움과 희생이 존중받지 못할수록 공멸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중에 가장 큰 이는 자신을 가장 낮추어 봉사하는 이라고 말씀하신다.(루카 9,48) 우리 사회에서 힘과 능력, 화려함이 아닌 아낌없이 자신을 받치는 겸손과 양보, 희생이 더 큰 가치로 존중받기를 바래본다.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국립대전현충원 전담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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