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년(경종 2) 3월 조선 정국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객, 독살, 위조 교서에 의한 폐출의 수단을 써서 경종을 몰아내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었다. 이 일로 노론세력의 주요 대신 등 수십 명이 죽임을 당했다. 임인옥사였다.

그러나 독살 기도 부분에 대하여는 관련 증언에도 불구하고 "`나인을 조사해 밝히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노론을 타도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니 앞으로 이런 문자는 써서 들이지 말라`(`경종실록` 2년 8월 18일)며 수사를 중지시켰다`"(이덕일·2010). 사건 확대를 경계한 의도였지만 당시 사회의 관습상 파격적인 조처였다.

경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나태`와 `식욕·참여`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식욕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으로 신체적·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를 자극하거나 갈등에 맞섬으로써 위험을 야기하기보다는 편안함 뒤에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너그럽고 이타적이며 자신의 희생으로 타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1688년에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은 숙종이 재위 14년 만에 얻은 첫 아들이었으므로 부친의 총애 속에 출생 100일도 되기 전에 원자로 책봉되었다. 이어서 세 살 때 세자가 되고, 그 해에 남인의 지지를 받던 모친도 인현왕후 민씨를 내쫓고 왕비 자리에 올랐을 만큼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해가 노골화되면서 1694년(숙종 20) 정권을 빼앗긴 서인의 주도로 그의 모친이 희빈으로 강등된 후 그의 나이 열네 살인 1701년(숙종 27)에 사사됨으로써 시련도 시작되었다. 더욱이 그보다 여섯 살 아래인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의 존재는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717년 노론 세력과 교감한 숙종은 세자의 대리청정 시행을 계기로 이미 정해진 왕권 승계의 변화를 의도했다. 1720년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승하하자 서른세 살에 경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시대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정치적 공세는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모친인 희빈 장씨의 신원회복 상소에는 벌을 주고, 모친을 죽인 선왕의 조처에 대한 찬사에는 침묵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당시 노론이 주요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에니어그램 9번 유형인 그가 이들을 자극하고 갈등을 야기함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위기를 회피하려는 심리적 기저가 작동한 결과였다. 그의 부친인 숙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정파간의 권력 투쟁을 자신의 왕권 강화에 선제적으로 이용한 사례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조처였다.

비록 병약했지만 1721년(경종 1)에는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자는 노론의 주장을 수용했고, 임인옥사 때는 연잉군이 연루된 정황에 따라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으나 그를 보호하여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하고 1724년 재위 4년 만에 3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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