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4년 8월 23일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은 송시열에게 원상(院相:임금의 멘토)을 청함과 동시에 부친의 능 지문(誌文)을 지을 것을 명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 때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이필익을 유배보내자 대사간 정석 등이 집단적으로 항의했는데, 숙종은 "`내가 어린 임금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내가 심히 통탄스럽고 해괴해서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고 꾸짖었다"(이덕일·2010). 어린 나이에 실로 대담한 조처였다.

숙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방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파벌인 동맹을 구성하고자 한다. 매우 실용적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좋은 거래를 찾아내는데 능숙하고, 기회주의적·자기본위적·계산적인 경향이 있다. 때로는 냉소적 불신을 보이고 상대방의 권위를 무시한다.

조선의 제19대 왕인 그는 1661년 8월 15일 현종의 외아들로 태어나 1667년(현종 8)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선왕의 급서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만큼 왕실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왕권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불가피해 보였지만 그는 달랐다.

그가 즉위했을 당시 조선사회는 각 정파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면서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붕당정치의 폐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와중에도 정파적 이익을 둘러싼 대신들의 권력투쟁을 자신의 왕권 강화에 십분 활용했다. 이른바 환국정치(換局政治)였다.

재위 1년에는 즉위 초기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는 현종의 장례과정에 대한 논란 중 송시열을 유배보내면서 남인 정권을 도왔고, 재위 6년에는 경신환국으로 허적, 윤휴 비롯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때 효종 이래 북벌을 지속적으로 주창하던 윤휴가 청 내부의 정국 안정과 함께 제거된 것은 자신의 권력 유지에 우선적 가치를 두었던 숙종의 의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재위 15년에는 희빈 장씨가 낳은 갓난 아기를 원자로 정하고 왕비를 교체하는 과정에 송시열을 유배, 사사하면서 다시 남인 정권을 세웠다. 기사환국이었다.

재위 20년에는 갑술환국으로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를 단행하였는데 이 과정에 왕비 장씨가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비되었던 민씨(인현왕후)가 복위했다. 이 외에도 재위 42년에는 서인에서 분파한 소론을 내치고 노론을 세웠다. 이 조처는 자신의 후대에 그대로 승계되어 조선 후기의 국정 운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렇듯 46년간 이어진 숙종의 치세에는 여러 차례의 의도된 환국으로 정국이 요동친 만큼, 비록 왕권 유지에는 영향이 없었을지라도 백성들의 삶을 위한 개혁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는 에니어그램 7번 유형이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을 통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를 찾는데 몰두한 예로, 필요에 따라 반복되는 동맹의 변경을 왕권 강화에 직결시키면서 기회주의적인 모습도 한껏 보여준 것이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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