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시대다. 맛집 탐방은 이 시대의 성지 순례요, 먹방은 이 시대의 복음이요, 음식평론가는 이 시대의 사도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이라는 이름의 하찮은 정보 목록에도 음식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무엇이 맛있는 것인가?

맛의 뿌리는 향토에 있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로부터 얻은 재료에 갖은 정성을 다하면 충분하다. 흔히 `고향의 맛`이라 불리는 맛이다. 맛의 줄기는 사방의 숙수들이 고심을 거듭하고 경험을 누적해 이룩한 비법으로 세운다. 향토음식의 명가들이 누대를 이어서 물려온 맛이다.

맛의 꽃은 어떻게 피어날까. 수만 가지 요리와 수백 가지 조리법에 능숙한 달인들이 온 세상에서 실어 나른 재료를 이용해 시간을 아끼지 않고 솜씨를 부리기 전에는 좀처럼 생겨나지 못한다. 세상의 이름난 요리 대부분이 제국의 번영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곳에서 일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한테도 신라로부터 이어진 `맛의 꽃`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신라의 맛이라고? 홀연히 증발한 듯 실감이 없다. 하지만 신라의 맛은 사라지기보다 진화했을 수 있다. 신라 멸망 후, 왕실 숙수들 대부분이 징발되어 개성으로 강제이주 한다. 그리고 경주 음식의 정화가 500년을 이어가 개성 음식이 된다. 이 음식이 다시 세월을 견디며 이룩한 것이 조선의 궁중 요리요 그 갈래인 서울의 반가 음식이다. 그러고 보면 `신라의 맛`은 한국 음식문화의 전통 자체가 된 듯하다. 큰 것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맛의 특징은 무엇일까. 맵지 않고 짜지 않다. 심심하고 담담하다. 재료로 혀를 즐겁게 할 뿐, 조미로 혀를 공격하지 않는다. 담(淡),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무미(無味)의 맛을 좇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맛없음`이야말로 `맛의 도`이면서 `삶의 도`임을 알았다.

공자는 말한다. "색칠을 하려면 먼저 바탕이 희어야지". 색깔과 형태를 먼저 보는 자는 그림을 모른다. 형태의 뚜렷함과 색깔의 강렬함은 바탕이 희어야 도드라진다. "흰색은 색의 근본으로 모든 색깔을 받아들인다"(`예기`). 여백을 그릴 줄 아는 이만이 그림의 도에 이를 수 있다.

노자가 그 뒤를 잇는다. "도에서 나온 말이여, 담백하구나, 아무 맛도 없도다". 참된 길은 맛이 없다. 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을 때 마차가 잘 구를 수 있듯, 음식의 한가운데 무미가 놓일 때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우리 음식의 절정 중 하나는 구절판이다. 경주 155호 고분에서 구절판 모양 칠기가 출토된 바 있으니, 이 음식은 신라 이래 요리인 듯하다. 아홉은 우주 전체를 뜻한다. 구절판은 세상 모든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의 요리다. 이 요리의 중심에 갖은 재료를 감싸는 무미의 밀전병이 있다. 맛없음만이 세상의 모든 식감을, 즉 시고 달고 쓰고 맵고 짜고 고소하고 바삭하고 쫀득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맛을 공존하게 해 준다. 무미의 맛을 모르는 이는 음식의 도를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는 유미(有味)에 빠져 있다. 인공조미료 문제가 아니다. 요리사들이 갈수록 맛의 강도를 높여 혀를 공격한다. 매운맛을 신맛으로 가리고, 짠맛을 단맛으로 속이며, 조악한 맛을 감칠맛으로 덮는다. 시중에 번져가는 `불`을 앞머리에 세운 음식들을 보라. 이 음식들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화형을 당한다. 몸의 고통을 잠시 잊으려고 뇌가 억지로 분비하는 마약성 호르몬에 중독된다.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호르몬을 즐기는 중이다. 삿된 미혹이고 감각의 생지옥이다.

`중용`은 말한다. "가장 세미한 것이 뚜렷하게 드러남을 아는 자는 도에 이를 수 있다." 소인의 길은 뚜렷하나 날로 사그라진다. 교묘한 말과 아양 떠는 얼굴빛에는 진실이 없다. 진리는 어눌함에, 보일 듯 말 듯하고 느껴질 듯 말 듯함에 존재한다. 군자의 길은 어둑하나 나날이 밝아진다. 좋은 음식은 맛이 없다. 강렬한 맛은 우리를 속인다.

미식의 시대다. 하지만 무미 없이는 미식도 없다. 무엇이 맛인가. 맛은 어디로 갔는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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