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흐르는그곳] 24. 한민시장

한민시장은 상인들이 직접 재배하는 채소가 유명하다. 한 채소가게에서 상인들이 채소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 = 김대욱 기자
한민시장은 상인들이 직접 재배하는 채소가 유명하다. 한 채소가게에서 상인들이 채소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 = 김대욱 기자
곧게 뻗은 길이다. 400m를 조금 넘는 거리다. 어른 걸음으로 넉넉잡아 15분이면 지나칠 골목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1시간여를 걷는다. 그 이상을 머무르기도 한다. 아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먹을거리며 구경할 거리며 각종 볼거리가 넘친다. 몇 걸음 걷다 보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탓에 멈춰야 한다. 대전 서구 괴정동의 한민시장이 그렇다.

지난 2일 그 곳을 찾았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요즘, 상인들은 진한 입김을 내뿜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양 쪽으로 빼곡히 늘어선 점포가 인상적이다. 서로 살결을 맞댄 채 매서운 한파를 견뎌내는 듯 하다. 전통시장에서나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한민시장의 한 가운데 위치한 고객지원센터에서 정희철 한민시장 상인회 부회장과 조순덕 상인회 매니저를 만났다. 며칠 전 동행취재를 부탁한 터였다. 정 부회장은 한민시장에서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앞치마를 걸친 채 밝게 인사를 건넸다. 고객지원센터는 장을 보러 온 고객들로 붐볐다. 설맞이 이벤트로 고객감사 페이백행사를 진행 중이었다. 시장에서 5만원 이상을 구매하면 온누리 상품권 5000원권을 증정하는 행사다. 하여 정 부회장도 바쁜 나머지 앞치마를 벗지 못했을 게다.

정 부회장은 "설맞이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중이라 손님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날씨가 추운데도 많이들 찾아주셔서 감사하죠. 고객 대부분이 주위 아파트나 주택단지에 사시는 분들이죠"라며 운을 뗐다.

이에 질세라 조 매니저가 설명에 나섰다. 지난해 부터 한민시장은 문화관광형 육성사업을 시행 중이란다. 이름하야 `장보고 문화교실`. 시장에서 고객들은 노래나 우쿨렐레를 배우며 캘리그라피를 그리기도 천연화장품을 만들기도 한다. 노래교실 강좌가 있는 날이면 거짓말을 조금 보태 소강당이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단다.

조 매니저는 "장보고 문화교실은 말 그대로 장을 보고 나서 문화교실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물론 무료지요. 지난해 3과목에서 올해 7과목으로 강좌수가 늘었어요. 노래교실 강좌는 소강당에 70-80명이 오시는데 꽉차요"라고 말했다.

직접 한민시장을 둘러 보기로 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양 쪽으로 입구가 터 있는 한민시장의 시작은 어디일까. 굳이 시작점을 정할 필요야 있겠냐만은 그 것은 발길을 내딛는 이의 몫에 두기로 했다. 정 부회장도, 조 매니저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한민시장은 막창이 유명하니, 막창골목으로 발길을 향했다. 반드시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다.

아직 장사를 시작하기 전이라 막창가게들은 저녁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후 4시쯤이었는데 돼지껍질을 굽는 냄새가 골목을 메웠다. 연탄과 숯에서 뿜어져 나오는 탄내는 식욕을 자극했다. 노릇노릇하게 굽는 돼지껍질이 먹음직스러워 군침을 흘렸더니 아주머니는 이내 "이따가 저녁에 오세요"라며 방긋 웃는다. 말만 잘 맞으면 돼지껍질 한 장은 덤으로 먹을 수 있다. 밤이 되면 이 곳은 불야성을 이룬다. 둥그런 테이블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운다. 서민의 향이 짙게 스민 곳이다. 대전의 막창하면 한민시장이란 대답이 나오는 이유다. 막창뿐만이랴. 뒷고기, 전집, 순대 등 깃갈나는 먹거리가 즐비해 막창골목이라기보다 먹자골목이란 표현이 맞다.

허기진 배를 뒤로하고 본 시장에 들어섰다. 4-5m 간격을 두고 양 갈래로 점포가 자리했다. 길게 늘어선 각 점포 머리맡에는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가 쓰여 있는 간판이 달려 있다. `정갈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은 아케이드가 설치돼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괜찮다. 현대화사업으로 재래시장만의 투박한 맛은 줄었지만 대신 깔끔함을 얻었다.

한민시장은 1980년대 초 재래시장을 자릴 잡기 시작했다. 인근에 주공아파트가 있어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됐다. 인근 주민들의 수요에 의해 서던 장터가 시장으로 발전했다. 심지어 인근에 있던 가장시장은 쇠퇴하고 한민시장만 남게 됐다. 시장이 처음 들어섰던 때는 시장 한 가운데로 개천이 흘렀단다. 지금은 현대화사업으로 천장이며 벽이며 으리으리한 자태를 뽐내지만, 과거에는 길거리에 천막을 쳐놓고 장사를 하는 수준이었다. 비가 오면 개천 물이 불어나고 연탄이 물에 젖어 난리가 났단다. 한민시장에서 청과상을 운영한지 올해 30년을 맞이한 권수안(59·여)씨의 말이다.

권씨는 "아들이 7살 일때 장사를 시작했는데 올해 녀석이 37살이니 장사를 한지 30년이 흘렀네요. 한민시장은 내 삶의 전부죠. 지금도 이렇게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하하)"라며 큰 웃음을 지었다.

이어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 그 때만 해도 난리도 아니었지. 비나 눈이 오면 시장 전체가 난리가 났어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웃음). 지금 이렇게 시장이 갖춰진 게 얼마나 좋아요"라며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의 점포 한 켠에는 아들의 졸업사진, 그가 수상한 각종 표창장이 붙어 있었다. 권씨가 한민시장을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민시장은 반찬가게와 채소가 유명하다. 채소가게의 경우 일부 점포는 직접 재배를 해서 판매를 하고 있다. 유통과정이 짧아지다 보니 가격은 저렴해지고 신선도도 담보할 수 있다. 양보다 질이라는 게 한민시장 채소가게들의 신념이다. 반찬가게는 이미 인근 지역 주부들에게 정평이 나있다. 매일 매일 들여오는 재료를 직접 조리하고 내놓는다. 월평·둔산동에서도 오는 단골손님들이 많다. 벌겋고도 반들반들한 무말랭이 무침을 한 입 먹었더니 감칠나는 식감이 일품이다. 요즘은 혼밥족들도 반찬가게를 많이 찾는다. 아파트단지 외 원룸 주택가에 사는 2030세대 고객들이 주다.

시장을 걷다 보니 젊은 점포가 눈에 띤다. 청년 창업을 한 이들이다. 도너츠를 팔기도 하고 정육점을 운영하기도 한다. 정 부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한민시장은 청년창업가들 비중이 유난히 많단다. 전체 점포의 20%는 2030대 사장들이다.

육개장 식당을 운영 중인 전옥배(29)씨도 한 달 여전 한민시장에 둥지를 틀었다. 조리학과 출신인 그는 전통시장의 열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전씨가 직접 손을 댔다.

전 씨는 "처음 전통시장에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한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전통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훈훈한 정이 좋았어요. 그래서 창업을 하게 됐고 아내와 함께 운영 중이죠. 점심에는 시장 상인분들을 비롯해서 많이 찾아주고 계세요"라고 말했다.

한민시장은 현재 240곳의 점포가 운영 중이다. 종사자수만 해도 600명에 달한다. 1일 이용객은 1만명, 주말에는 1만5000명이 다녀간다. 시장을 찾는 주요 고객은 인근의 아파트 주민들이다. 5000가구의 아파트 단지가 배후에 있어 주민밀집 전통시장이다.

주부 이숙자(52·여)씨는 "시장 옆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10년 가까이 시장을 이용하고 있는데 너무 편리하고 좋다. 대형마트에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함이 강점인데다 상인들도 하나같이 친절해서 매주 시장을 찾고 있다. 이런 게 전통시장의 매력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한민시장은 문화관광형시장으로 발돋움을 앞두고 있다. 올해는 8억원, 내년에는 6억원을 투입해 ICT디자인, 자생력 강화사업, 이벤트 사업 등 각종 관련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과거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시장이다.

김용길 한민시장 상인회장은 "한민시장은 배후환경에 아파트 단지가 위치해 오후 4-5시 쯤이면 고객들로 항상 붐빈다"며 "언제나 한민시장을 찾아주시는 고객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다양한 사업 추진을 통해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한민시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대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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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시장의 한 전집에서 고객들이 전을 구매하고 있다. 사진 = 김대욱 기자
한민시장의 한 전집에서 고객들이 전을 구매하고 있다. 사진 = 김대욱 기자
한민시장 내부 모습. 사진 = 김대욱 기자
한민시장 내부 모습. 사진 = 김대욱 기자
한민시장 상인회에서 기획한 플래카드가 천장에 걸려 있다. 사진 = 김대욱 기자
한민시장 상인회에서 기획한 플래카드가 천장에 걸려 있다. 사진 = 김대욱 기자
대전 한민시장 전경. 사진 = 김대욱 기자
대전 한민시장 전경. 사진 = 김대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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