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6년 만주 일대의 여진족 세력을 규합한 누르하치가 `대금`을 건국하여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면서 명나라를 압박하자 국력이 쇠락한 명은 1618년(광해군 10) 4월 조선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당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의 대신들은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이구동성으로 파병을 주장했다. 이에 1619년(광해군 11)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여 명의 군대가 명군에 합세해 후금에 맞섰으나 패퇴했다. 이 상황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후금 장수)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의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광해군일기`11년 4월 8일 조)"(이덕일·2010).

광해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두려움과 의무·강함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규칙과 기준을 강박적으로 지키려 하며, 두려움을 지우기 위하여 확실함을 추구하고 흑·백을 가려내는 통찰력을 보인다. 두려울수록 공격이라는 방어태도로 위험에 직면함으로써 안전감을 느끼려 하며 만용으로 흐르기도 한다.

1575년(선조 8)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광해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에 피난 도중 평양에서 동복형 임해군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 전란 기간에는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에서 민심 수습과 군사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1608년 선조가 재위 41년 만에 승하하자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심지어 세자 책봉 후에도 부친 선조의 우유부단과 정치적 반대세력인 소북파의 견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즉위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은 1613년 대북파의 주도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 죽임을 당하였고, 1618년에는 인목대비도 폐모 후 서궁에 유폐되었다.

광해군이 명·청 교체기에 선택한 대외정책은 에니어그램 6번 유형이 통찰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불필요한 국력 소모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특정 정치세력의 정파적 이익에서 비롯된 이복형제의 제거와 계모에 대한 폐서인 조처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사회에서 패륜행위로 공분을 일으켰고 정적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는 왕권 방어에도 어설펐다.

이는 6번 유형의 두려움에서 기인한 공격적인 태도가 사안에 대한 정확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필요한 조치가 완결되어 추가적인 위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만용에 근거한 것이었다.

결국 통찰력과 만용의 양면성을 가진 그는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고, 15년 간 왕위에 있었음에도 조·종(朝宗)의 묘호(廟號)도 없었다. 그의 치세에 보여주었던 대외정책의 장점도 계승되지 못했으며 조선은 양대 호란(胡亂)이라는 국난을 겪어야 했음도 물론이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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