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비상구(非常口). 평시에 사용하는 출입구가 아닌, 급작스러운 화재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용하는 탈출구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말은 이미 `압구정동`이 비상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 곳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압구정동`이란 무엇일까? 이 책에서 그려지는 `압구정동`은 한편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속하며 청담동과 신사동 사이에 위치한 행정상의 구획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끓어오르는 탐욕의 도가니이자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처럼 환락과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돼버린 거리를 상징한다.

책 속에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압구정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의문의 `젊은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범행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은 성도착증에 걸린 노파, 성전환수술을 한 트랜스잰더, 양재동 빌라의 방탕한 여대생 등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압구정동에 살았던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압구정동 주민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들의 내면이 압구정동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타락한 한국식 자본주의의 속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1990년대 한국 소설의 한 정점을 이룬 작가이다. 그는 이뤄질 수 없는 두 남녀의 가슴 시린 사랑을 그린 소설 `은비령`(1996)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은비령은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은 추리 기법의 사회 비판 소설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에 뽑힌 `비상구가 없다`의 원작이다. 자연과 성찰이라는 치유의 화법을 구사한 이후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소설에는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선택한 소재들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의 대담함에 놀라고, 다음으로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규탄하는 작가의 행간에서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날선 혐오감과 분노를 발견하며 다시 놀라게 될 것이다. 이호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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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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