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국가의 인물관이나 위인관은 그 나라의 주화나 지폐의 모델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지폐의 모델을 통해 국민들에게 바람직한 위인상을 전파하고 계도하는 것이다.

미국 지폐의 모델은 역대 미국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통령들 위주다. 조지 워싱턴부터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등. 여기에 대통령은 아니지만 미국 건국의 기초를 마련한 벤자민 프랭클린과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 장군이 포함된다. 철저히 내재적인 인물들이다. 다양한 이민족의 통합과 근대국가 건설에 공이 많은 인물을 내세워, 연합국가 미국의 가치를 내세우는 데 목적이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근대 문화예술, 과학 분야를 선도한 유럽에 대한 열등감도 반영된 것 같다.

일본은 국민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와 근대소설의 개척자인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 그리고 일본 근대화론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지폐 모델이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정치가도 모델로 등장한 적이 있지만 문인과 생물학자와 근대사상가를 주로 내세운 것은 전범국으로서의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를 재고하는 동시에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를 이룬 성과를 드러내고자 한 것 같다.

프랑스 지폐의 모델은 황제 나폴레옹과 드골 대통령 같은 정치가를 빼면 모두가 예술가나 과학자나 사상가들로 채워져 있다. 미생물학자 파스퇴르, 사상가 몽테스키외, 수학자 파스칼, 작곡가 드뷔시, 화가 들라크루아, 화자 세잔, 건축기사 에펠 등이 그들이다. 근대유럽 사상의 한축을 담당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문화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 걸로 보여진다. 면면이 참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전인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프랑스 특유의 인물관이 반영된 듯하다. 오랜 왕조의 역사를 가진 나라임에도 국왕이 지폐의 모델로 등장하지 않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세계의 기준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영국도 프랑스 못지않다. 과학자이자 사상가인 아이작 뉴턴,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 영문학의 비조 셰익스피어, 현대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조지 스티븐슨, 소설가 제인 오스틴, 음악가 엘가, 간호사 나이팅게일, 정치가 윈스턴 처칠, 화가 터너 등 주로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적 각성을 이룬 인물을 내세워 산업혁명과 근대과학의 근원지임을 과시한다. 이들에게 밀린 인물만 가지고도 3순위 리스트까지는 너끈히 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지폐 모델은 액면가별로 모조리 마오쩌둥이다. 붉은 군대의 중국혁명과 일당 공산당 건설의 신화에 아직도 취해 있다. 인물관이고 위인관이랄 게 없다. 할 말 없다.

우리나라는 주지하다시피 이순신, 이퇴계, 이율곡, 세종대왕, 신사임당이 지폐에 등장한다. 모두가 조선조의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의 전 역사는 물론이고 조선 500년 문화가 저들로만 대변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근대적 인물은 워낙 찬반 양론이 많아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손 치더라도 조선의 인물만으로, 그것도 유학을 바탕으로 한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로만 채운 것은 지나친 편향으로 보인다. 조선 역사에는 주류 지배층에 의미 있는 항거를 한 인물도 많다. 연암 박지원도 그렇고 허균도 그렇고 정약용도 그렇다. 동학 지도자인 전봉준은 또 어떤가. 화가엔 서민을 즐겨 그린 김홍도와 장승업도 있다. 과감하게 이데올로기적 진영 논리에서 자유로운 김소월이나 이상 같은 문인을 모델로 하는 건 또 어떤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나 김구 같은 이들이 반대 진영의 목소리 때문에 모델로 지명되지 못하는 건 우리 근대사의 복잡한 슬픔이다. 지금 한국 주화와 지폐 모델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정도를 빼놓고는 납득이 잘 안 되는, 상상력이 거세된, 편의적인 타협의 결과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은연중 신분과 계급과 명분 중심의 인물관이 스며 들어 있다. 마땅히 재고되어야 한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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