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1987.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6월 민주항쟁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슬프고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를 담고 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이들, 드러난 진실 앞에 함께 분노하며 거리로 나선 학생과 시민들, 외면하지 못하고 최류탄 연기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던 사람들…. 마치 그 속에 함께하고 있는 듯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몇 장면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싸우며 그 시대를 살아 온 우리들의 기억이기 때문에 더 마음을 울렸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는 수많은 박종철과 이한열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거리에서 교단에서 삶의 현장 곳곳에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밑거름으로 피어난 것이다. 대전·세종·충남만 하더라도 민족민주열사와 희생자로 기리는 분들이 28분에 이른다. 그 분들 중 1987년에는 이순덕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이순덕 선생님은 1984년 예산여고에 재직할 당시 그릇된 교육 현실을 고쳐나가고자 하는 열망과 학생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교사들을 보며 교육운동에 눈을 떴다. 홍성YMCA중등교육자협의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열성적인 교육운동가로 나서게 되었다. 1985년 대전체육고등학교로 옮긴 뒤에는 대전YMCA 교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등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이런 일들이 문제가 되어 부임 1년 만에 강제로 충남 서천의 서면중학교로 쫓겨났다.

서면중학교에서 이순덕은 교육관료들의 철저한 감시와 고립 속에 놓인다. 해방 직후 월남한 교장은 영화 1987에 등장하는 박처장처럼 뼛속 깊은 반공주의자였다. 수업 내용부터 학급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교사들과 잠시 나눈 이야기까지 곧바로 교장실로 전달되었다. 나중에는 아이들을 교장실로 불러다 학급 생일잔치 때 나눠준 책을 압수하고 진술서를 쓰게 했다. 심지어 군대 가는 동료의 환송회를 열자 한 사람씩 불러다 진술서를 받기도 했다. 학생과 학부모들에는 선생님을 좌경분자로 몰아갔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외로움이 선생님을 지치고 힘들게 했다.

그런 가운데도 선생님은 서울에서 열린 5·10 교육민주화 선언에 참여하고, 충청교육민주화선언에도 참여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거의 매일 교장실로 불려가 문답서 작성을 강요당했다. 단호히 거절하는 선생님을 학교에서 쫓아내기 위해 징계 절차를 밟아 나갔다. 선생님은 이에 맞서 그동안 자신에게 가해진 탄압의 실상을 정리해 양심선언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정면으로 맞섰다.

집요한 탄압과 이간질, 온갖 회유와 협박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는 동안 선생님의 몸에는 암세포가 슬금슬금 자라고 있었다. 결국 쓰러져 입원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폐암 말기였다. 병실에서 직위해제를 통보를 받고 그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도교육위원회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이순덕 교사는 징계되었으니 의료보험을 적용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고문과 다를 바 없는 폭압에 맞서 싸웠던 선생님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1987년 1월 3일 새벽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956년 12월에 태어났으니 갓 서른을 넘긴 짧은 생애였다.

84년에 해직되어 학교 밖 교사였던 나에게나 뜻있는 선생님들께 이순덕 선생님은 큰 힘을 주는 동지였기에 그의 죽음은 큰 슬픔이었다. 김순호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선생님을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선생님의 몸은 땅에 묻었으나 그 뜻은 함께 했던 모두의 가슴에 묻었다. 그 뒤로 이어진 교육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길에서, 30년 뒤 촛불혁명의 물결 속에서 선생님은 우리 가슴 속에서 앞길을 밝혀 준 횃불이었다.

1987년은 박종철, 이한열, 이순덕 그리고 수 많은 열사들, 피땀 흘리며 함께 했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함성으로, 거대한 촛불의 물결로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들 가슴을 울리며 힘차게 응답한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면 언젠가 세상은 바뀐다고. 그리고 묻는다. 영화 1987이 끝날 때 울리는 노래 `그날이 오면`의 `그날`은 온 것인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 2018년의 우리가 답할 차례다. 최교진 세종시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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