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한 당일로 성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두 살이었으므로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정사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수렴청정은 성종이 성년이 된 후에도 지속되었다. 대비와 공신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475년(성종 7) 대비를 비방하는 투서 사건을 계기로 대비가 정권이양을 언급하자 공신들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성종은 몇 차례 사양하다가 다음과 같이 정권 수용의사를 밝혔다.

"`내가 생각하기에 온 나라의 번거로운 사무로 성체(聖體:대비의 몸)를 수고스럽게 하는 것도 편안히 봉양하는 도리는 아니므로 부득이 지금부터 국가의 모든 정사는 내 뜻으로 결단하고 대왕대비에게 아뢰어 처결하지 않을 것이다『성종실록』 7년 1월 13일`"(이덕일·2010).

성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은 `도전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욕망과 생존·만족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에게는 물질적 필요가 적시에 충족되기를 바라는 강한 욕구가 있으며 좌절을 견디지 못한다. 필요를 채우려는 강한 욕망·욕정을 가지고 있고, 좌절되었을 때 분노를 참지 못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고 우위를 점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성종은 1457년(세조 3)에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드라마틱한 요소와 행운이 어우러졌다. 세조의 장자이자 그의 부친인 의경세자가 1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차자인 예종이 왕위를 이었지만 그 역시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예종의 맏아들인 제안대군은 당시 3세로 너무 어려서 왕위를 승계하기는 무리하였고, 성종의 가계에도 그보다 세 살 위인 동복형 월산대군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의 장인이자 공신세력의 대표격인 한명회는 그의 즉위에 결정적인 지렛대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조정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누구인지, 왕권은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았다. 그에게 선대왕 예종의 이력은 좋은 지침서였다.

그는 재위 2년 자신의 즉위에 공이 있는 인사에 대해 공신책봉을 통해 보답했고, 공신을 주축으로 하는 원상들의 매관매직 수단이던 분경과 관련한 논란에서도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에니어그램 8번 유형이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의 방법을 알고 우위를 점하는 모습의 하나였다. 그가 재위 9년에 홍문관을 설치하여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탄핵권과 언론권을 가지고 공신세력을 견제토록 한 것도 어느정도 왕권이 확립된 후의 일이었다.

그는 호문호색(好文好色)의 군주답게 3명의 왕비와 8명의 후궁, 왕자 16명 공주·옹주 12명을 두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명한 폐비 윤씨 사건을 낳아 그 친자이자 후대 왕인 연산군에게 많은 짐을 넘겨주었다. 이것 또한 8번 유형인 그의 여성편력에 왕비가 반발하자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보아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표출한 예의 하나였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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