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권, 대전에 활력을 ① '내 몸에 꼭 맞는' 대전형 자치분권 시동

대한민국이 여섯번째 헌법 체제를 갖춘 지 30년이 지났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군부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여전히 모든 권력은 대통령과 중앙 정부에 집중됐다. "강산이 3번이나 바뀌는 시간 동안 정부 정책은 여전히 1980년대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는 일사분란함이 요구되는 2차산업 위주의 개발시대에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변화에 둔감한 경직성은 4차 산업혁명 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 환경에 대응하기에는 뒤떨어진다. 대한민국은 정체기로 접어들었고, 지역은 고사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중앙 공급식 정책은 한계에 도달했다는 진단 속에 지방분권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기획 시리즈 `분권 개헌 내 삶 바꾼다`를 통해 선진국들이 개헌으로 창출한 혁신을 살펴봤다. 제1부에서 외국의 성공적인 사례로 지방분권이라는 거대담론에 다가섰다면 제2부에서는 분권형 개헌으로 바뀔 지역민의 삶을 짚어보려 한다.

◇왜 분권인가…몸에 맞지 않는 옷을 바꾸자=중앙집권적 행정 체제는 보급품으로 나온 군복과 같다.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듯 지역마다 형편이 다른데 기성복을 입다 보면 꽉 끼어 답답한 이가 있는가 하면 헐거워 불편한 이도 있다.

지난 25일 한국원자력연구원은 가연성폐기물소각장 화재사건 사고경위가 은폐됐다고 밝혔다. 대전시는 대국민 공개 사과와 함께 진상규명과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대전시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지만 시의 영향력은 더이상 미치지 못한다. 원자력안전법에 따라 연구용 원자로 허가를 취소하거나 사업 정지를 명할 수 있는 건 원자력안전위원회 뿐이다.

지역 고유의 특성이 있고 때론 시급성을 요하기도 하는 복지사업이 정부 지침에 발목을 잡힐 때도 있다. 대전시는 경제적 문제로 구직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최대 180만원을 사용할 수 있는 `청년취업 희망카드`를 지급하고 있다. 청년 인구 비중이 높은 대전시가 지역의 당면한 문제인 청년실업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시 예산을 갖고 펼치는 시책이지만 사업을 시행하기 전 중앙정부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지자체가 사회보장제도를 신설·변경할 경우, 보건복지부 장관과 협의하도록 한 사회보장사업 신설·변경 협의제도 때문이다.

이와 달리 아예 기존 제도가 없어 제약을 받는 사례도 있다. 대전시가 지난해말 제정한 물순환 개선 조례가 대표적이다. 지방자치법 22조 단서 조항은 국민의 권리·의무를 제한하는 조례를 만들 땐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상위 법령이 없을 땐 결국 강제 조항 없이 권고 조항만으로 조례를 만들게 돼 유명무실해진다. 물순환 조례 8조는 시장에게 사전협의 제도를 마련해 시행하도록 하면서도 개발사업의 시행자나 인가·허가권자에게는 사전협의를 강제하지는 않고 있다. 시설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시장에게 사전협의를 요청할 수 있다고만 했다.

최근 대전시가 야심차게 내놓은 `대덕특구 리노베이션` 계획도 과학기술부와 국토건설부 등 중앙부처와 지난한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판교테크노밸리의 성공 신화를 벤치 마킹하려면 고밀도 집적화가 필수적인데 입지 규제, 용적률·건폐율을 완화하려면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대덕특구는 대전에서 차지하는 면적에 비해 지역 기여도가 미흡한 편이다. 특구법은 전국적으로 동시 적용되는데 지역성을 감안해야 한다. 전국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대덕특구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또다른 현안사업인 하수종말처리장 이전도 특구의 영향을 받고 있다. 대전시는 2025년까지 이전하겠다는 계획이지만 특구 개발계획 변경, 그린벨트 해제 등 중앙정부와 협의가 관건이다.

지역의 미래 비전이 반토막 난 사례도 있다. 대전국제전시컨벤션 건립은 마이스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는 대전시에겐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지만 중앙정부의 시선은 달랐다. 지방투자사업관리센터(LIMAC)의 타당성 조사 과정에서 사업 규모를 절반으로 줄여야 했다. 이밖에도 삼중규제를 받고 있는 대청호 개발 문제, 친수구역 개발, 장기미집행 도시공원 문제들도 중앙집권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주민들의 삶에 보다 다가설 수 있는 현안들이다.

중앙에 종속된 재정은 맞지 않는 옷에 억지로 몸을 맞추게 하기도 한다. 도시재생 뉴딜 등 분야에서 지역에 꼭 필요한 대전형 사업을 발굴하기 보다는 먼저 정부 공모사업을 따내기 위한 사업행정에 골몰하기 일쑤다. 이제 자치분권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 입을 때다.

◇임박한 골든타임… 시민 참여부터 시동=전체 인구의 절반(2015년 기준 2525만 명)이 국토 면적인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밀집하는 등 수도권은 비대화하고, 지방은 존립 자체마저 위협받고 있다. 한 연구결과에서는 전국 시·군·구 지방자치단체 226개 중 30%가 30년 후 없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국가는 오랜 전통, 기억, 역사, 문화, 관습으로 연결된 지역 공동체들의 집합체다. 지방 소멸 현상은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전 국가적 문제이기도 하다. 자치분권은 이같은 지역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최근 "지난 50년간 중앙정부가 기획하고 돈을 마련하고 끌고 가면 지방은 따라가다보니 저출산, 청년실업 등 문제와 관련해 어느 하나 내 사정에 맞게 우리 지역에 맞게 해주는 것이 없었다"며 "그래서 내 동네, 내 지역의 살림은 우리 스스로가 책임지는 국가운영을 해보자는 게 자치분권"이라고 말했다.

자치분권을 중앙의 권력을 지방에 나눠주는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 집중됐던 본래의 권리와 의무를 되돌려 받는다는 시각이 더 정확하다. 대한민국은 명목상 지방분권 국가이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재정과 권한은 여전히 중앙이 통제한다. 환경, 경제, 복지 분야에서 지역마다 고유한 문제가 있어도 지방정부는 맞춤식 정책을 펼칠 수 없다. 식물 지방자치라는 현실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다. 참여정부 때인 2004년 1월 `지방분권특별법`이 제정돼 분권에 관한 기본 방향과 내용이 정해졌다. 그러나 한시법인 데다가 제대로 이행도 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지방분권을 주요 국정과제로 천명한 이유이자 개헌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지난 23일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자치분권 실현을 위한 총괄기구인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가 출범했다. 핵심 추진과제는 자치분권 로드맵 확정·발표, 범정부 재정분권TF를 통한 재정분권 실현, 지방이양일괄법 제정 추진, 자치경찰제 법제화 및 시범운영 실시, 지방분권형 헌법개정 지원 등이다.

대전시도 이같은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다. 지난달부터 전국적으로 지방분권개헌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대전시 5개 자치구는 이번 서명운동에서 대전 전체 서명 목표 인원을 총 30만 3755명으로 잡았다. 시는 주민 접점인 읍면동을 효율화하고 마을자치를 활성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정부 `혁신 읍면동 시범사업`에 선정된 대덕구 송촌동을 중심으로 현장밀착형 복지서비스를 확대하고 주민대표기구 활성화, 지역 특화마을 조성 등 공동체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대전을 대전답게 만드는 대전형 분권프로젝트의 첫 걸음으로 자치분권 순회 토론회도 연다. 자치분권의 필요성을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분야별 토의 및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다는 취지다. 지난 26일 서구청에서 `우리 마을, 내 삶을 바꾸는 자치분권 대전이 앞장섭니다`를 주제로 풀뿌리 주민자치와 분권 강화를 위한 시민토론회를 개최했다. 하승창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의 `다음 세대의 정부를 위한 고려 사회혁신과 행정의 결합` 특강에 이어 곽현근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를 좌장으로 장용석 사회적자본지원센터장, 김화진 서구 마을넷 대표, 하경환 행정안전부 주민자치지원팀장이 참여해 마을공동체 사업의 성과와 비전을 논의하는 토론이 진행됐다. 앞으로 3월까지 각 구청과, 시청을 순회하며 권한 지방이양, 재정분권, 지방정부 역량, 네트워크형 행정체계, 지역역량 결집을 주제로 총 6회 이상 토론회를 가질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지역 역량 제고와 시민 참여는 자치분권의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이를 위해 토론회를 마련했다"며 "자치와 분권 하면 멀게만 느낄 수 있는데 삶을 바꾸는 변화로써 시민들이 피부에 와닿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는 데 주안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이용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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