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수 피아니스트
조윤수 피아니스트
"돈 버는 일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잘 되는 비즈니스는 최고의 예술이다."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상업 미술로 현대 예술의 판을 바꾼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다운 발언이다.

만약 앤디 워홀이 몇 백 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고귀하고 숭고한 예술을 위해 가난과 굶주림, 질병으로 평생 고통 받으며 예술의 혼을 불태우다 쓸쓸히 세상을 떠나야 했던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같은 예술가들이 좀 더 편안히 호의호식하며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고흐도 살아생전 단 한 개의 작품을 팔아 돈을 벌었으니, 그 당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만큼이나 고행의 삶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현대 사회의 예술가들이 지난 시대의 거의 모든 예술인들의 한이었을 가난의 짐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해준 것은 앤디 워홀 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예술가의 지향점을 근본부터 흔든 파격적인 예술관의 변화이다.

옛것을 지키기 위해 낭만시대의 비인기 형식이었던 소나타를 고집하여 수많은 피아노 소나타 작품을 남긴 슈베르트는 앤디 워홀의 관점에서는 어리석고 무의미 할 뿐 아니라 심지어진정한 예술조차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이미 한 물 간 소나타 형식의 작곡은 이를 듣고 싶어 하는 청중도 없다는 면에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워홀의 표현에 따르면 돈이 안 되는, 뛰어난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워홀의 주장을 따르자면, 쇼팽이나 리스트처럼 시대와 유행에 맞게 소품과 살롱음악을 위한 녹턴이나 아기자기한 왈츠를 즐겨 작곡하는 것이 청중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팩토리`라 명명했던 자신의 스튜디오 이름처럼 대량생산되었던 팝아트의 작품들같이, 작고 사적인 살롱 음악회 공간이 아닌 수만 명의 청중들이 흥겨움의 경지를 넘어 혼이 빠진 듯 열광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어 아우성치는 열광적 콘서트가 바로 대중을 위한, 돈이 되는 뛰어난 예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앤디 워홀의 예술 철학대로 오늘 날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해 내는 아이돌 가수들이나 세계를 투어하며 100회 이상 연주를 하는 랑랑 등의 유명 연주자가 부와 대중의 인기 속에 풍요로운 삶을 누릴지 모르지만,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지키고자 했던 예술가들이 돈이 되지 않는 예술을 추구했기 때문에 과연 최고의 예술이 아니었다고 봐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표현 예술에 있어서 수익성을 추구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희생되는 것이 개성과, 창의성, 그리고 온전함을 향한 진실성이다. 워홀의 대량으로 찍어낸 마릴린 몬로의 사진들, 캠벨 스프 캔을 쌓아 올린 작품들이 상징하는 상업예술이 오늘 날 자본주의 세계의 예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술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넘어서서 오랜 시간과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한 개의 숭고한 작품에 깃든 정신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윤수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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