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배 논설위원
나병배 논설위원
평창올림픽에서 중국 장예모 감독 영화 `영웅`을 떠올린다. 지난 2003년 개봉된 영화 속 장면들과 서사 구조를 차용하면 현재 진행형인 평창 스토리 구성과 대강 맞닿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천하의 시작`이라는 부제도 절묘하다. 현재의 남북 상황을 함의하는 듯 해 평창을 내다보고 서브타이틀을 뽑은 것 같은 착시마저 일어난다. 영화적 각색이라서 해석은 자유 영역이다.

영화가 설정한 시·공간적 배경은 중국 역사 연대기표 상단을 차지하는 전국시대인데 `사기`속 `자객열전`에서 모티브를 따온 모양이다. 당연히 그 시절 7웅의 패자인 진시황이 등장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 역은 당대 내로라 하는 중화권 배우들로 캐스팅됐다. 여기서 키워드는 자객이고 그 대척점에 진시황이 있다. 평창 상황에서도 이 유사한 구석이 느껴진다. 이분법적으로 구획하려면 무리가 따르긴 하지만 한반도에서도 패권경쟁이 고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형국이고 어쨌든 남과 북은 직접 당사자들이다.

그런 남과 북이 평창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계기로 해빙무드를 타고 있다.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의 1박 2일 일정 방남은 서막에 불과하다. 아마도 강릉 아트센터 및 서울 국립극장에서 갖는 두 차례 북측 예술단 공연이 정점을 찍을 듯하다. 일련의 국면 전개가 영화 속 핵심장면을 연상케 한다. 누가 진시황이고 누가 자객이인지를 따지고 들 경우 선악논리에 매몰돼 가치공감대 폭이 좁아진다. 이점을 직시한다면 평창 담론도 분단논리의 틀로써 예단하거나 해석의 과잉 행태는 유예할 필요성이 커진다.

영화에서 진시황과 자객 사이의 공간적 거리는 차츰 가까워진다. 서로 노림수가 교차하지만 100보 앞 알현 허용에서 시작해 20보, 10보 앞까지 좁혀지는 데에 복선이 깔려 있다. 진시황은 비무장 상태이고 10보 앞 최고의 검객 솜씨라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판인데도 1대 1 담판을 서슴지 않는다. 영화적 결말은 자객의 자진퇴거다. 진시황 목숨을 거둠으로써 얻는 실익에 대해 회의함과 동시에 마음을 접는 클라이막스 순간이다.

북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예술단 방남 공연 행사도 영화의 이 언저리 부근이 될 듯 싶다. 북이 주된 적임을 확인하지만 그렇다고 군사·경제적 힘의 논리를 구사하기가 쉽지 않다. 누가 먼저 발동을 걸었든 평창은 남북관계를 열어가기 위한 중대 길목이고 지정학적 공간이다. 만약 평창 카드가 아니었다면 한반도의 숨 막히는 정세에 숨통을 틔우기가 여의치 않았다. 평창은 영화에 비유하면 천하의 시작점인 셈이고 그 천하는 평화로 치환돼야 함은 물론이다. 영화 속 로케이션 못지 않게 평창은 그런 기회의 땅일 수 있다. 남측은 조건 없이 올림픽 참가를 환영했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접도 해주었다.

일부 부정적인 국민 정서가 걸린다. 나중에 동상이몽으로 막을 내릴 것이라는 비관론을 모르지 않으며 사실 일리 있는 측면을 배제하지 못한다. 현 정권, 정부 당국도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 있다. 평창올림픽이 평화올림픽이 돼야 한다는 방향성은 원칙적으로 옳다. 다만 북의 막판 평창행 열차 탑승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평창올림픽을 치른 뒤에 적어도 북이 국제사회에서 양허될 수 있는 수준의 비핵화 협상에 부응하지 않고 버티고 나오면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 개연성이 높다.

영화 `영웅`은 시종 극한의 대결구도를 고집하면서 끝내는 극적 대반전을 선사한다. 하드웨어적 힘 대 힘의 갈등과 충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대의에 순응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가능했던 귀결이다. 어쩌면 그 영화적 무대와 미장센이 평창으로 옮겨진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 천하질서와 평창 천하가 같지 않고 그때 대의명분과 평창 대의가 등치되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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