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국권 침탈 이후 일제는 구 한국은행을 대신해 1911년 8월 15일 조선은행을 설립했다. 일제 강점기 초기 조선은행은 식민지 중앙은행으로서 운용자금의 상당 부분을 조선총독부의 재정활동 지원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조선은행은 조선은행법의 공포와 함께 조선 은행권 제조를 일본 내각인쇄국에 발주했다. 은행권 종류 및 모양뿐만 아니라 제조, 발행, 손권(훼손 화폐) 교환 및 소각 절차도 총독의 인가를 얻어야 했다. 당시 조선은행권은 주로 조선총독부 직영 공장에서 만들어졌으나 1924년 이후에는 일본 내각인쇄국에서 제조되기도 했다. 은행권 제조처에 따라 은행권 앞면 아래에 `조선총독부인쇄`, `대일본제국정부내각인쇄국제조`로 기재되어 있다. 기호의 괄호 모양도 총독부 직영 제조는 `< >`, 내각인쇄국은 `{ }`로 표시했으며 기번호의 아라비아 숫자 자형도 서로 달랐다.

1924년부터 조선은행권은 대부분 일본 내각인쇄국에서 제조됐으나 전쟁중인 1945년에 일본의 해상 보급로가 차단됨에 따라 조선으로의 은행권 운송이 어려워졌다. 이에 일본은 1945년 1월 조선은행권의 현지 제조계획을 수립했다. 그해 2월에서 3월까지 일본은 은행권 제조기술자를 우리나라에 파견해 현지 조사하는 한편 4월에는 대장성, 대본영, 육국, 해군 4자간 긴급회의를 소집해 다음과 같은 조선은행권의 현지 제조 계획을 추진했다.

첫째, 일본 인쇄국은 서울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민간 제지공장과 인쇄공장을 동원해 조선은행권을 제조한다. 둘째, 은행권 용지는 북선제지 군산공장에서 제조하되, 지질은 펄프 65%, 대마 35%로 하고 숨은 그림은 넣지 않는다. 셋째, 인쇄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이용하되, 철판인쇄주식회사로 하여금 평판인쇄기 4대, 철판인쇄기 5대, 절단기 4대, 연마기 1대 및 이에 따른 부속설비를 옮기도록 한다. 넷째, 잉크는 당분간 일본에서 공급하되, 조선잉크주식회사 시설을 정비해 빠른 시일 내에 현지에서 공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인쇄국 은행권 제조기술자 4명을 우리나라에 파견해 은행권을 제조하도록 했는데, 원판을 신규로 제작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1000원권의 앞면은 10원권 원판 일부를, 뒷면은 5원권 원판 일부를 확대 변형했다. 100원권은 종래 원판을 그대로 사용했다. 은행권 용지는 전쟁말기의 물자부족으로 인해 조폐용지가 아닌 서울시내 지물도매상에서 구입한 모조지를 활용했다.

8.15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는 조선은행권 이외에 일본은행권, 대만은행권 및 일본군 군표 등이 혼용되고 있었다. 1945년 9월 7일 통화에 대한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에 의거, 38도선 이남 지역에서는 미군이 발행한 보조군표인 `A`자가 찍힌 `원(圓)` 표시 통화가 법화로 지정됨과 동시에 일본군 군표는 무효화되고 유통이 금지됐다. 일본은행권 및 대만은행권은 1946년 2월 21일 유통이 정지됐다. 이후 일본인들은 광복 이전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사용하던 100원권 인쇄원판을 가져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근택인쇄소에서 1945년 8월 하순부터 9월초까지 보름간 조선은행권을 불법적으로 제조했다. 이런 와중에 근택인쇄소에서 평판 공정으로 근무하던 김창선은 일본인들이 9월 상순에 철수하면서 은행권 종판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100원권 인쇄판을 절취하고 1200만원의 위조지폐를 조선정판사에서 인쇄·유포했다. 이것이 소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다.

조선은행은 1946년 7월 1일 드디어 일본색을 버리고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인쇄방식을 오프셋(off set)인쇄에서 활판인쇄로 바꾼 조선은행 100원권을 발행했다. 앞면의 일본 정부 휘장인 오동꽃을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로 바꾸고 일본은행권 태환에 관한 일본어 문구를 삭제하는 한편, 제조처 표시도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제조`로 변경하고 뒷면의 일본국화인 꽃도 무궁화로 대체했다. 김재민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연구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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