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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가 된 詩·빛바랜 구절도 여기선 '신상' 입니다

2018-01-23기사 편집 2018-01-23 14: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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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흐르는 그곳]대전 동구 헌책방 골목

첨부사진1대전 동구 원동의 헌책방 골목. 헌책들이 가게의 한 켠에 쌓여있다. 가게 안은 이미 포화상태. 자리를 찾지 못한 책들을 가게밖 인도에 쌓아뒀다. 김달호 기자
책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었다. 갖고 싶은 책 하나 장만하는 것이 기쁨이었다. 그렇게 산 책에 좋은 문구가 있으면 자를 대고 반듯하게 그어가며 몇 번이나 읽고, 노트에 꾹꾹 눌러 써 메모해가며 읊조리던, 책이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듯 책에 대한 대우도 변했다. 부족함이 채워져 세상은 더 풍요로워 졌지만 상대적으로 책에 대한 가치는 이전만 못한 것 같다. 책 보다는 TV, 영화, 인터넷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책을 찾는 이들은 있다. 서점을 운영했던 한 노인은 시(詩)의 작법에 관한 책을 찾았고, 또 다른 노인은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 기타 교본을 찾았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중년 남자는 공인중개사를 준비하기 위한 문제집을, 머리 모양이 정갈한 한 노신사는 제왕을 위한 책 통감(通鑑)을 찾으러 헌책방을 찾았다.

대전 동구 원동에 위치한 헌책방 골목은 이런 이들로 인해 오늘도 영업중이다.

겨울 치고는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다 다시 찬 바람이 불던 지난 22일 오후 원동 헌책방 골목을 찾았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인 고려당서점 장세철(84) 사장은 책 더미 속 간이 의자에 앉아 손님을 맞고 있었다. 고려당서점에 보관 중인 책만 5만여 권. 가게 안은 이미 책을 둘 곳이 없어 인도까지 책이 점령한 상태다. 성경, 소설, 인문서적, 참고서, 잡지, 과학서적, 의학서적 등 없는 게 없어 보였다. 불규칙 하게 놓인 책들을 보면 과연 손님이 원하는 책을 제 때 찾을까 싶지만 장 사장은 그 정도는 자신의 머리 속에 다 있다며 괜한 걱정을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곳이 책방 골목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원동서점이 첫 문을 열고 이어 박문서점이 생기면서 이 곳은 책방거리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중앙시장, 홍명상가까지 20여 곳의 책방이 생겼다. 당시에는 신간서적 보다는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를 주로 판매했다. 하지만 1990년대 대전의 발전과 함께 둔산신도시가 개발되고 중심이 옮겨가면서 이 곳은 헌책방골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마침 대형서점이 들어서면서 이 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점차 줄어들었고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곳으로 모습이 변해갔다.

고려당서점 장 사장이 이 곳에 자리잡은 지는 한창 옛 서점이 활기를 띄던 약 45년 전. 강산이 네 번하고 반이 바뀔 동안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10곳도 되지 않는다. 그 중 6곳이 이 헌책방 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헌책방 골목이라고는 하지만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찾는 이들이 많지도 않았다. 현대화 된 중앙시장 한 켠에 가게 몇 곳이 띄엄띄엄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장 사장은 "가게가 생길 때 쯤에는 주위에 원동국민학교가 있어서 참고서 위주로 많이 팔았다. 70-80년대에는 지식인들이 읽고는 싶지만 읽지 못하는 금서들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 돈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청계천으로 책을 구하러 갔다가 눈에 띄면 하나, 둘 집어와 필요한 이들에게 그냥 줬다"며 "그 때는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책을 찾는 이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 2016년 2대째 이어왔던 헌책방인 청양서점이 45년 만에 문을 닫았고, 앞서 또 다른 서점 두 곳이 폐업해 중고 레코드 가게로 바뀌면서 이 곳에는 성실서점, 영창서점, 육일서점, 국민서점 등 6곳 정도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가게가 있는 만큼 많지는 않지만 손님도 꾸준히 이곳을 찾는다. 주로 연구를 하는 학자, 은퇴한 노인, 희귀한 책들을 모으는 수집가들이 주 고객이다. 취재를 하던 중 한 노신사가 통감을 찾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 하지만 아쉽게 장 사장의 집에는 통감은 없었다. 장 사장은 "국민서점으로 가서 한번 물어봐요. 그 곳에는 있을 거에요"라며 서점의 위치를 알려줬다.

장 사장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한 노인은 기타교본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고 있던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장에게 "이것보다 좀 더 쉬운 책은 없나"라고 묻자 장 사장은 다른 책과 비교하며 "지금 보고 있는 책이 가장 기본서"라고 답했다. 이 노인은 "기타를 배우려는 이유는 따로 없다. 손가락을 움직이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해서 한 권 보러 나왔다"며 "얼마전에는 일본어 입문책을 샀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장 사장은 원래는 1만 원인데 8000원에 가져 가라며 노인에게 흥정을 걸었고, "이거 봐도 제대로 칠 수 있으려나"라고 하는 노인에게 "어려워서 못 보겠다 싶으면 4000-5000원은 쳐줄 테니 다시 가져오라"고 말했다.

중·장년, 노인층이 대부분인 이들 가게와 달리 대전에는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대형문고가 지속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유성구에 영풍문고가 문을 열었고, 앞서 둔산동 교보문고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개점하면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온라인 서점 수익은 지난 2016년 처음으로 오프라인 서점 수익을 앞질렀다.

또 다른 가게 사장은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있겠느냐. 그들을 경쟁업체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많은 이들이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은 책을 읽기 보다는 손에 휴대폰 하나씩 들고 단편적인 정보만 접하니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빗방울이 날리고, 바람이 더 불자 장 사장은 급히 비닐을 이용해 책들을 덮었다. 혹여나 비에 젖을 세라 두 겹, 세 겹으로 책들을 덮었다. 매일 아침 8시 30분 나와, 오후 7시까지 간이용 의자에 앉아 책방을 오가는 이들과 이야기 하며 장사를 하는 장 사장은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이미 접은 지 오래다. 그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울 뿐"이라며 "앞으로도 여력이 닿는데 까지는 책방을 운영할 예정이다. 책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와 진리가 담겨있다. 책을 늘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 사장은 궂은 날씨에 서둘러 가게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다고 해봐야 별 다른 것이 없다. 비에 젖지 않게 책들을 덥고 주위를 둘러보고 가게를 잠그는 것이 전부다.

장 사장은 "언제든 이야기를 이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 다시 와요. 할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으니…"라며 낡은 수첩 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김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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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대전 동구 원동의 헌책방 골목. 헌책들이 가게의 한 켠에 쌓여있다. 가게 안은 이미 포화상태. 자리를 찾지 못한 책들을 가게밖 인도에 쌓아뒀다. 김달호 기자
첨부사진3이 곳의 터줏대감인 고려당서점 장세철 사장이 쌓아 둔 책 옆 간이의자에 앉아 있다. 장 사장은 이 곳에 앉아 손님 응대는 물론, 오고가는 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김달호 기자
첨부사진4대전 동구 원동의 헌책방 골목. 헌책들이 가게의 한 켠에 쌓여있다. 가게 안은 이미 포화상태. 자리를 찾지 못한 책들을 가게밖 인도에 쌓아뒀다. 김달호 기자
첨부사진5한국 출판 사상 1000만부 돌파라는 대 기록을 세우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돼 출간된 소설 태백산맥이 헌책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김달호 기자
첨부사진6공인중개사 문제집을 찾는 손님을 위해 빠르게 책을 찾는 장세철 사장. 그는 수 많은 책들 속에서도 손님이 원하는 책을 단번에 찾아냈다. 김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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