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즉위 과정이 무리했던 만큼 엄청난 수의 공신을 양산하고 이들을 특권층으로 만들어 왕권을 나누어 가졌다. 한 예로 이들은 백성들의 세금을 선납한 후 그 대가로 몇 배의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였는데 그 폐해가 막심했다. 이를 막고자 예종은 즉위 초부터 대납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근절되지 않자 방을 붙여 대납 금지를 재천명했다.

"지금부터 대납하는 자는 즉시 극형에 처해 민생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입법의 본 뜻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이익을 취하고 있다 진달하는 자가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하는 자는 마땅히 목을 베겠다"(`예종실록` 즉위년 12월 9일`(이덕일, 2010)).

예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두려움`과 `의무(duty)`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규칙과 기준을 강박적으로 지키려 하고,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확실함을 추구하며 추상적인 논리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기도 한다.

1450년(세종 32) 세조의 대군시절에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장남인 의경세자가 사망하자 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세조가 승하하기 전 날인 1468년 9월 7일 세조의 선위로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은 비교적 순탄했으나 그의 앞에는 이미 거대한 공신집단이 형성돼 정상적인 왕권행사에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인 세조는 즉위 직후 책봉된 공신집단과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책봉된 공신집단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상호 대립시키면서 왕권을 유지했으나 예종은 달랐다. 그는 사헌부 관리까지 동원해 권세가와 종친의 집에 드나들며 인사청탁하는 분경을 철저히 금했다. 심지어 분경행위를 하던 하인들을 체포하여 왕이 직접 국문하기도 했다.

이는 에니어그램 6번 유형이 규칙과 기준을 강박적으로 지키려 하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확실함에 집착하는 모습 중의 하나이다.

이런 예종의 정책은 세조 이후의 왕조를 자신들과의 공동정권으로 인식하는 공신들에게는 기득권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여졌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공신들의 전횡을 바로잡고 자신이 추구하는 원칙을 세울 힘을 갖추기도 전이었다. 권세가들의 불만은 활화산처럼 분출하고 갈등은 증폭되었다. 게다가 1468년(즉위년) 10월에는 유자광의 석연치 않은 역모 고변으로 공신세력의 한 축인 남이 등을 제거해 자신에게 반발하는 다른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바탕도 허물어버렸다.

세조가 쿠데타로 얻은 왕위는 아들인 예종에게로 이어졌으나 그 과정에서 축적된 부채는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그는 세자 시절부터 보아온 공신세력의 폐해를 타파해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자 했지만 기득권세력의 반발로 여의치 않았고, 재위 14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그의 의도도 좌절되고 말았다.

예종의 좌절은 에니어그램 6번 유형들이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만큼 신념에 대한 강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조급함 때문에 본질을 그르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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