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여행으로 시작했다. 교토, 나라, 오사카 등을 쏘다니면서 온갖 명승과 유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꼈다. 스마트폰 어플로 확인하니 걸어 다닌 거리만 100킬로미터를 훌쩍 넘었다.

교토는 고스란하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인 천년고도답게, 세월을 얹을수록 아취를 더하는 중이다. 부족한 듯 소박하기에 오히려 마음이 충만해지고, 꾸미지 않아 한적하기에 도리어 마음이 광대해진다. 청수사도, 여우신사도, 금각사도, 메이지신궁의 정원도 좋지만, 교토의 절정은 개인적으로 은각사다. 비바람의 힘만으로 장식한 목조건물들, 굵은 모래흙으로 쌓아올린 탑, 갈퀴로 훑은 듯 꾸민 정원…. 저절로 가만해지는 마음에 번뇌가 무너지고 언어의 길이 투두둑 끊긴다.

오감은 정직하다. 누구나 아는 만큼 감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은 `앎의 한정`을 파괴한다. 여행지에서 평소대로 오감을 쓰는 사람은 없다. 경이로운 세부에 눈을 가져가고, 사소한 소리에 귀를 들이대며, 신비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고, 낯선 음식에 혀를 대고, 신선한 공기에 피부를 연다. 지금 이 순간 이 몸을 충격하는 이 느낌, 이 불꽃, 이 파도가 우리의 `습관적 앎`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스스로 무너진 앎을 세우고 끊긴 언어의 길을 잇는다면 철학이나 예술이 될 것이다. 여행은 우리를 철학자나 예술가로 만든다.

여행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르게 걷기로부터 나온다. 여행은 `앞으로 걷기`가 아니라 `뒤로 걷기`다. `앞으로 걷기`란 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몸을 옮기는, 이동을 위한 걷기다. 사람들은 걷기의 본질이 이동에 있다고 흔히 착각한다. 하지만 기차나 자동차 같은 수단이 나온 후에도 인간은 걸어서 서울에서 대전을 가곤 한다. 이동하려고 대전까지 걷는 사람이 극히 드문 걸 보면, 현대인은 이동하려고 걷는 게 아니다. 차라리 현대인에게 걷기의 본질은 심신의 균형을 잡고, 세계를 탐구하며, 생각을 새롭히는 수단이다. 앞으로 걷지 않고 뒤로 걸을 때, 우리는 걷기의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일본의 철학자 가와모토 히데오에 따르면, `뒤로 걷기`를 통해 우리는 `앞으로 걷기`에서 느낄 수 없는 감각이나 지각을 깨울 수 있다. 평소에 익숙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체를 사용하고 행동을 일으킴으로써 우리 안에 잠재한 어떤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여행은 낯선 환경과 낯선 언어 속에서 낯선 방식으로 몸을 움직임으로써,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삶을 창발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여행을 즐긴다는 것은, 이렇게 깨어난 몸을 데리고 돌아오는 법을 익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들 나름의 비법이 있겠지만 나한테 여행은 책 없이 안 된다. 여행 중에 읽는 책은 여행에서 얻은 감각이 흩어지지 않도록 공명을 일으키고 깊이를 부여하는 최상급 재료를 제공한다. 여행지와 관련한 책들을 챙겨가, 곤한 몸을 이기면서 밤마다 읽는 일은 때때로 또 다른 경이를 불러오기도 한다. 은각사 체험의 여운이 끝없는 너울을 일으켜 마음을 어쩌지 못하던 밤에, 맥주 한 잔 땅콩 몇 알을 놓고 김응교 선생의 `일본적 마음`을 읽었다. 거기, 헤아릴 길 없는 마음의 정체를 알려주는 빛나는 통찰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은각사가 주는 미적 체험을 `와비사비`라고 부른다. 와비는 `가난함의 미학`이다. "가난한 삶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탈속에까지 승화되는 경지"다. 꾸밈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본질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사비는 `한적함의 미학`이다. 비움으로써 "깊이 파고드는 고요함"을 깨닫는 미의식이다. 빈자리에서 오히려 "한없는 깊이와 넓이를 깨닫는" 것이다. 아아, 부지불식간에 번잡함을 버리고 무의미한 일상을 정리하며 삶의 중핵에 닻을 내릴 시기를 기다려온 것이었을까. 앞으로 걸을 때는 몰랐다가 뒤로 걸으니 비로소 그 사실을 온 감각이 알려준 것은 아닐까.

구들에 몸이 달라붙는 계절이다. 안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 내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일어섰다. 여러분은 어떤가. 무엇으로 한 해를 시작하셨는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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