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미 KRISS 책임연구원
이승미 KRISS 책임연구원
뒤늦게 영화 `1987`을 봤다.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 해 그 시절을 살아 지나왔으면서도 세월과 함께 망각했거나 외면하고 있었던 어떤 기억들을 영화가 소환한 때문이었을까.

영화의 주요 무대이기도 한 연세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는 신촌의 창서초등학교다. 나는 창서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구구단만큼이나 잘 외워야 했던, 국민학생이었다.)를 1985년에 졸업한 연희동 꼬마였다. 학교는 하필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에서 모두 가까웠다. 신촌에선 거의 매일 최루탄 쏘는 소리가 쾅쾅 울려 퍼졌고, 매캐한 최루탄 냄새는 바람을 타고 나 같은 꼬마들의 눈과 코에까지 파고들곤 했다. 그랬다,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건 우리는 항상 눈물콧물 흘리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치약을 눈 밑에 짜두면 눈물이 덜 난다, 세수를 하면 더 맵다, 엄마 크림을 바르면 얼굴이 덜 따갑다는 따위의 얘기가 연희동 꼬마들의 일상 대화주제였다. 그건 쪽지시험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하필 내가 살던 집도 연세대에서 가까운 연희3동이었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 맞은편이 바로 연세대학교였다. 어른들은 `공부하라고 비싼 학교 보내놨더니 맨날 돌팔매질이나 하고 앉았다`며 혀를 찼다. "대학생 언니오빠들은 왜 공부 안 해?"라는 내 질문은 "공부해서 알게 됐어. 지금은 이래야 한다는 걸"이라던, 한 대학생 언니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묻혀버렸다.

내 중학교 시절도 상황이 별로 달라지진 않았다. 연북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연희2동에 살던 친구 집 골목 어귀엔 늘 사복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최루탄 연기가 유독 짙은 날이면 골목 경비는 한층 더 삼엄해졌다. `늘 지켜지는 그 집` 가까이 살던 내 동창은 그런 날이면 경비를 통과하지 못하고 친구 집에서 한참을 신세지다가 연기가 다 걷힌 밤에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도 사흘이 멀다 하고 책가방을 구석구석 보여주는 검문검색을 통과해야만 그 길을 지나갈 수 있었다. 단지 집에 가기 위해서 말이다. 연희동에 사는 한, 꼬마라도 하굣길에 엄중한 검문을 받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고등학교조차 청와대 바로 코앞에 있는 진명여고에 다니게 됐다. 청와대가 찍힐 수 있다는 이유로 도서관 3층에선가는 아예 사진촬영조차 금지돼 있던 학교였다. 등교할 때마다 나는 줄선 경찰들 사이로 공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등하교를 반복해야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영화를 보면서 나는 1980년대의 사회상황을 더 실감했다. 항상 같은 옷을 입고 골목 구석에 서있던 사복경찰들, 언제인지 모르게 바닥에 뿌려졌던 인쇄물들, 가방 검사받다가 바로 내 앞에서 어디론가 끌려가던 대학생 언니, 꼬마의 책가방 속을 샅샅이 뒤지며 즐거워하던 잠바 입은 아저씨들, 잘못한 것 하나 없이도 마냥 움츠러들었던 연희동 꼬맹이.

영화 `1987` 마지막 장면에서 `연희(!)`는 마침내 버스 위에 올라서고, 수많은 대학생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장면을 바라본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끝나버린다. 대학가뿐 아니라 일반 시민과 직장인들까지 나선 6월 이야기,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 등은 이하 생략돼 있다. 1987년은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해였다. 연희동 중학생이던 나조차도 일시에 사방에서 울리던 자동차 경적 소리를 기억할 정도로.

지난 겨울에는 영화 아닌 뉴스에서 30년 전과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영화 속의 연희처럼, `그런다고 뭐가 바뀌기나 해?`하던 일반 시민들과 먹고 살기 바쁜 직장인들까지 또 다시 추운 거리에 모인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무엇이 바뀌었고, 또 무엇이 그대로이기에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야만 했을까? 영화를 통해 30년 전을 새삼 실감하며 마음이 아득했던 나는, 30년 후에는 과연 어떤 영화에서 어떤 기분을 되새기게 될까?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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