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재위 20년(1744년) 5월 병이 들어 약원(藥院)의 진찰을 받을 때 신하들은 영조의 침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때 임금은 목면으로 만든 침의(寢衣; 잠옷)를 입었으며…이불 하나 요 하나도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 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 또 기완(器玩; 자기)도 없어서…여항(閭巷; 민간)의 호귀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와 검소한 덕에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이덕일, 2010).

영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방어·희생`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가족의 울타리 같은 동맹을 구성하며 그 이익을 우선시 한다. 매우 현실적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좋은 거래를 찾아내려 하지만, 때로는 금욕적이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모습에서 감정의 기복을 나타낸다. 붙임성 있으며, 쾌락주의자 기질도 있다.

1694년(숙종 20) 숙종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연잉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어머니(숙빈 최씨)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성장과정과 즉위 후에도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자 그의 이복형인 왕세자가 소론의 지지를 받아 즉위해 경종이 됐다. 한편 소론과 대립하던 노론의 주요 대신들의 주도로 경종 1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이후 임금의 신병을 이유로 한 대리청정 요구는 소론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어서 노론 세력 170여 명이 역모로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고, 심지어는 연잉군과 인척관계에 있는 인사 몇 명이 처형되기까지 했다.

1724년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뜨자 우여곡절 끝에 연잉군이 서른 살의 나이로 즉위함으로써 드디어 영조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즉위와 함께 퍼진 경종 독살설은 재위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으며, 세제 시절부터 노론의 지지를 받아왔던 그의 선택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7번 유형답게 노론을 방어벽으로 삼았다. 그가 간간히 제시한 탕평은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의 치세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누적되어온 정파간 분쟁이 명분보다는 이익을 기준으로 첨예화된 시기였다. 사대부들의 지나친 사치에 임금이 솔선해 근검한 모습을 보이면서 변화를 유도하고자 했으나 이미 난망한 일이었다. 그는 정권 안정과 민생을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감정의 기복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임금 중 최장인 52년 간 재위한 영조에게 즉위 전·후 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7번 유형답게 난관을 극복하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지지기반인 노론과의 동맹에 집중했고, 심지어는 비극으로 이어진 사도세자와의 갈등 속에서도 이런 정치적인 입장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대가 저무는 단계에서는 더 이상 동맹이 필요치 않았고, 세손에게 무사히 왕위를 승계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도록 하는 현실성을 보였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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