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언의 허벅지 살을 메스로 쭉 그었다. 메스 끝으로 갈라진 피부를 양옆으로 밀쳤다. 허벅지 살 아래에는 서로 얽혀 있는 가늘고 두꺼운 끈이 많았다. 메스에 묻은 희고 끈적한 기름을 거즈로 닦아낸 나는 세심하게 끈을 제쳤다. 끈 밑에 숨어있는 혈관을 찾아냈다. 메스를 소독 천에 내려놓고 혈관을 살살 당겨 잘 보이도록 꺼냈다. 기름과 땀에 젖은 손가락이 미끈거렸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즈로 손을 닦으면서 나는 이언의 발목에 매여 있는 인식표 ㅇ-12A를 확인했다. ㅇ-12A는 방부 처리실에서 붙여준 이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발가벗겨진 채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이언에게 나는 몸을 기울였다.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어 손을 잡았다.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느끼며 다문 이언의 입을 뚫어지게 보았다. 말싸움을 할 때마다 거품을 물던, 라면을 나눠먹고 소주를 마시던, 허옇게 각질이 일어나 늘 립글로스를 발라주던 입이었다. 이언의 손을 놓고 거즈를 집었다. 자잘한 상흔이 보이는 입 꼬리, 도톰한 입술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혀를 문질렀다. 거즈에 쓸리며 입술이 꿈틀거렸다. 입술 가까이 귀를 대보았으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스테인리스 벽장에 반사된 형광등 빛이 입술 위로 떨어졌고, 메스에 부딪쳤다. 방부 처리실의 냉랭한 공기도 벨 만큼 날 선 빛이었다.

방부 처리실은 환기 시설이 잘 되어있었으나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떠다녔다. 출입문인 승강기에서 내리면 바로 마스크를 써야 했다. 영하 십도를 넘나드는 바깥 날씨 때문에 북쪽 벽에 난 창문은 열 엄두도 못 냈다. 블라인드를 내린 창틀 가장자리에 언뜻 그림이 보였다. 벽은 고정이 끝난 시신인 카데바를 보관하는 벽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벽장 앞에는 스테인리스 침대가 정렬되어 있었다. 그 옆에 각종 소독제와 거즈, 외과용 도구가 놓인 이동식 탁자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고정이 시작되었다. 고정이란 시신의 몸에 포르말린을 주입하는 작업이다. 나는 멸균 천위에 놓인 캐뉼라 주삿바늘을 집어 들었다. 조금 따끔하다고 말하고는 끝이 뭉툭한 캐뉼라 주삿바늘을 꺼내 놓은 허벅지의 넓적다리 혈관에 찔렀다. 바늘이 들어가자 혈관 부위가 꿈틀, 했다. 다 됐어요. 바늘에 연결된 링거 관의 중간 밸브를 서너 번 열고 닫으면서 링거 관을 타고 혈관으로 들어가는 포르말린 액체의 흐름이 원활한지 주시했다. 맹독 물질인 포르말린 액체는 일급수처럼 맑았다. 마셔도 될 것 같았으나 마시면 썩지 않는 투명한 액체를 보며 나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님을 실감했다. 링거 관은 겉면에 검은색 해골 그림과 붉은 엑스표가 선명한 회색 펌프 통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펌프 통의 핸들을 돌리면서 나는 포르말린 분출 속도를 조절했다.

맞은편에서 고정 작업을 하던 송이 고개를 들었다. 공시인 씨, 목에도 캐뉼라 꽂으세요. 송의 지시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가자며 라텍스 장갑을 벗어 폐기물 통에 던졌다. 콧잔등까지 쓰고 있던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고 가운 주머니에서 립글로스를 꺼내 갈라진 입술에 발랐다. 워크숍에 쓸 프래시 카데바가 필요하다더니 송은 서두르고 있었다. 바로 고정을 끝냈거나, 고정한 지 하루 이틀 지난 프래시 카데바는 성형외과나 피부과 의사 대상 워크숍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나는 이언의 시신이 프래시 카데바로 쓰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시신의 상태에 따라 나는 고정시간을 조정했다. 잠을 자듯 편안히 숨을 거둔 시신은 여유를 갖고 서서히, 집중치료실에서 나온 시신은 가급적 빨리 고정을 마치는 게 나만의 규칙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시간 만에 고정이 끝나기도 했다. 고정 시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시신의 피부색은 달라졌는데 천천히 할수록 원래의 피부색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시신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희붐하게 누르스름했고,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는 축축하게 젖은 듯 누르께했다. 배 부분은 연보랏빛이 감도는 누런색으로 변했다. 반면, 단시간에 고정을 하면 같은 색깔이라도 칙칙하고 얼룩이 많았다.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시신의 몸에 각인된 상처들이 얼룩으로 표출되는 거였다. 레버를 조절하며 나는 포르말린 주입 속도를 조금 늦췄다.

바코드와 인식번호 ㅇ-12A 스티커가 붙은 서류에 나는 고정 시작 시간, 시간당 포르말린 주입량과 속도를 적었다. 어제도 썼던 볼펜으로 같은 숫자를 적는데 숫자가 삐치듯 미끄러졌다. 서류 위엔 볼펜 똥이 뭉쳐졌다. 언뜻 보면 발견하지도 못할 작은 볼펜 똥에 나는 자꾸 신경이 쓰였다. 볼펜심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숫자 끝에 뭉친 볼펜 똥을 집어냈다. 기록한 사항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서류와 볼펜을 탁자에 가볍게 던졌다.

이언은 나의 다섯 번째 가족이었다. 나는 방을 같이 쓰는 방식으로 가족을 만들었다. 같이 지내던 가족이 나가면 전봇대에 새 가족을 구하는 광고지를 붙였다. 네 번째 가족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아직 추운 삼월, 나는 월세 10만 원, 보증금 없음, 욕실, 냉장고, 세탁기 있음, 가족같이 지낼 분만 연락 바람. 연락처 010-1234-0000이라고 쓴 광고지를 전봇대에 붙이고 돌아섰다. 휴대폰으로 웹툰을 보며 걷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톡톡 쳤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회색 작업복을 입은 이언이 검은색 가방을 들고 서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이언은 온순하면서도 뭔가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과 두툼한 입술 탓인지 수더분해 보였다. 이언은 방금 내가 붙인 광고지와 오만 원 권 두 장을 흔들어 보였다. 이언을 쓱 훑어본 나는 오만 원 권 두 장을 낚아챘다.

이언과 함께 나는 집으로 갔다. 이언이 내 곁에 바투 붙어 걷는 바람에 검은색 가방이 내 허벅지를 턱턱 쳤다. 나는 옆으로 비켜서며 이마를 찌푸렸다. 가방에 뭐가 들었느냐고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언은 바퀴벌레가 들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퀴벌레?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주머니에 넣었던 오만 원 권 두 장을 꺼내주면서 바퀴벌레는 사양한다고, 그냥 가던 길을 가시라고 말했다. 이언은 난감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바퀴벌레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다, 일이 끝나면 바퀴벌레 가족은 화장시킬 거다, 박제를 했으니까 걱정 마라, 얼마나 깨끗한지 보여 주겠다며 검은색 가방의 지퍼를 반쯤 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보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죽은 바퀴벌레를 들고 다니는 이유가 뭔지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언은 고개를 숙이고 만화를 그리거든요, 라면서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가족? 가족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헉헉거리며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지나 가장 안쪽 끝 방 앞에 섰다.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 정면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인 문이 또 보였다. 나의 아지트인 벽장의 문이었다. 벽장을 보면 나는 죽은 아버지가 떠올랐다.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왔다. 집에 와서는 내 책상에서 책이며 가방, 노트, 연필, 스탠드 같은 물건을 내다 버렸다. 평생 시험공부만 할 거냐며 돈을 벌라고 윽박질렀다. 독립해라, 돈을 벌어라, 알바라도 하라는 강요에 시달릴수록 나는 더욱 빈둥거렸다. 아버지가 가고 나면 버려진 물건을 집어와 벽장에 숨겼다. 벽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깨지고, 찢어지고, 찌그러지고, 부러진 물건을 고쳤다. 어두컴컴한 벽장 구석에서 간혹 벌레가 나오면 눌러 죽였다. 벌레를 아버지라 생각하면서. 아버지는 제법 비싼 요리를 만드는 중국 음식점 주방에서 일했는데 가스통이 터지는 대형 화재 사고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버렸다. 시커먼 돌로 변해버린 아버지라니. 가무잡잡한 피부에 불룩하게 나온 배를 탁탁 치면서 잔소리를 해대던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니. 미워할 아버지조차 없다는 사실에 나는 돌연 쓸쓸해졌다. 한동안 벽장에 틀어박혀 잠만 잤다.

이언은 벽장을 쓰게 해달라고 졸랐다. 월세를 더 내겠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도맡아 하겠다며 사정했다. 너무 간절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그러라고 할 뻔했으나 냉정하게 거절했다. 이언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속이 타는지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너무 빡빡하다고 툴툴거렸다. 투덜대는 이언을 쏘아보던 나는 치근대는 사람은 질색이라고 내뱉었다.

"시신과 같이 지내 본 적 있나요? 시신은 절대 치근대지 않아요. 그래서 정이 가죠."

내말을 듣던 이언은 이맛살을 찡그리며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해부학 기사.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짙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더니 해부학과 의사냐고 다시 질문했다. 청력에 문제 있어요? 의사가 아니라 기사라니까.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이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은 내 직업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이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해부 실습을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관리하다가, 마지막에 장례까지 치러주는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언은 그런 직업도 있었느냐고, 멋진 일을 한다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내가 하는 일을 멋진 일이라고 말해준 사람은 이언이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벽장을 써야겠다고 계속 졸랐다. 결국 집안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내가 출근하고 없을 때만 이언이 벽장을 쓰게 해줬다.

벽장을 나눠 쓰기로 정한 날, 이언과 나는 벽장에 쪼그리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바퀴벌레를 위하여, 포르말린을 위하여 건배했다. 소주 한 병을 마시고는 서로 말을 놨다. 나이 같은 건 묻지도 않고. 두 병을 비우고는 벽장의 용도를 놓고 싸웠다. 벽장은 저장고다, 수선소다, 라는 내 의견과는 다르게 이언은 공작소다, 창작소다, 라고 우겼다. 이언과 나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소주잔이 비기가 무섭게 부어 마셨다. 소주를 세 병째 마시고나니 혀가 꼬였다. 나는 말싸움의 주제를 잊어버렸고, 이언은 졸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한기를 느낀 나는 눈을 떴다. 비좁은 벽장 안에 등을 바닥에 대고 반듯하게 누운 이언 위에 내가 누워 있었다. 몸을 꿈틀거리자 이언이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송의 휴대폰 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고 전화를 받는 송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소리를 낮추더니 문 밖으로 나갔다. 계약직인 나는 송의 도움이 필요했다. 조만간 재계약 공지가 날 것이고 송의 근무평가가 절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재계약이 되기를 바랐지만 세상일은 내 예상을 자주 뒤엎었다. 재계약이 안 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삐딱하게 놓여있는 스테인리스 침대를 벽과 평행이 정돈하고 흐트러진 도구들은 제자리에 놓으며 이언을 보았다.

맨몸의 이언을 보니 나도 추웠다. 쇳소리를 내는 창문이 추운 느낌을 가중시켰다. 무수히 많은 가는 못으로 철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리는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소리의 진폭이 가팔라질수록 수많은 바늘이 동시에 내 머리통을 찌르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나는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틀 위로 눈이 제법 쌓였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걷는 사람에게 주차요원이 비키라고 손짓을 하면서 호루라기를 불었다. 주차장 옆의 발인식장에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방금 발인식이 끝난 모양이었다. 화환을 옆으로 치울 때마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어깨 위로 국화 꽃잎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꽃잎을 밟고 지나갔다. 거뭇한 발자국이 찍힌 꽃잎이 바람에 들썩이고, 쓸려가고, 엎어지고, 날아갔다. 사람들이 밟고 간 꽃잎 위로 상조회사 로고가 박힌 검은 차가 서서히 지나갔다. 바큇자국이 이내 눈에 덮여 흐릿해졌다.

송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표정이 어두웠다. 고정은 잘 되고 있느냐고 화난 듯 물었다. 이 남자 시신 언제 들어왔어요? 나는 송의 표정을 살피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새벽 다섯 신가에 들어왔을 거야. 서류에 적혀 있잖아. 서해안에 있는 수목원에서 발견됐는데 바지 주머니에 시신 기증서가 있었다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내 알바는 아니지만 우리 병원을 콕 찍었대. 사연이 있다는 거지. 근데 그게 왜 궁금해요?"

송은 묻지도 않은 말까지 늘어놓더니 정색을 하며 방부 처리실 지침을 잊었느냐, 감정 따윈 필요도, 쓸모도 없다고 덧붙였다. 시간이 남으면 고정 작업이나 마저 하라고 성을 냈다. 그게 화낼 일인가. 고정 작업을 할 때 나는 생각에 감정까지 통째로 버렸다. 입사 면접 때의 충격 때문이었다. 죽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을 받고 나는 망연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죽음 앞에서 생각 따윈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짧게 대답했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합격 연락을 받고는 죽고, 사는데 생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요일에 이런 지시를 내리는 저의가 뭘까요?"

나는 주말에 특근이라도 하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특근이 아니더라도 사실 나는 이번 주말은 쉬지 못할 게 뻔했다. 이언이 해왔던 청소와 빨래를 해야 했고, 이언의 바퀴 가족 그림과 가방 속에 들어있는 바퀴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저의 같은 건 말단에겐 어울리지 않는 고급 단어야."

스테인리스 침대를 내 앞으로 밀면서 송이 이죽거렸다. 나는 지난주에 송과 술을 먹다 내뱉었던 말이 목에 걸렸다. 이혼남인데다 직속상관인 송이 치근대는 바람에 이언 이야기를 했었다. 남자친구와 같이 산다고, 창틀에 붙여놓은 바퀴 가족 그림도 남자친구가 그린 거라고. 말하고선 후회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독한 감기약을 먹은 탓인지 속이 메슥거렸다. 나는 이언이 누운 스테인리스 침대에라도 눕고 싶었다.

이언은 바퀴 가족이라는 제목의 만화를 그렸다. 나무가 많은 곳으로 놀러갔다가 엄마 손을 놓쳐 고아가 됐다는 이언은 가족에 집착했다. 벌레 중에서도 바퀴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는 그 대단한 재주를 기껏 바퀴벌레 가족이나 그리면서 허비하느냐고 꿍얼거렸다. 이언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기린이든 사자든 고양이든 바퀴든 상관이 있느냐, 가족은 같은 의미의 가족이라고 단언했다.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더 이상 대응하지 않았다. 가족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말할 게 없어서였다. 나를 보는 이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언의 복잡한 속내를 나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이마에 쓴 헤드램프를 켠 이언은 오른쪽 눈에 시계 수선공들이 쓰는 돋보기를 끼웠다. 어둠 속에 앉아 부분조명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마치 광산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 같았다. 내가 애꾸눈 광부라고 놀리면 이언은 망친 바퀴벌레 그림을 집어던졌다. 방안엔 한쪽 다리가 없거나 더듬이가 잘린 바퀴벌레, 화가 난, 웃는, 소리치는, 임신했거나 출산을 마친 바퀴벌레, 새끼, 대장, 엄마, 할아버지 바퀴벌레들이 기어가고, 엎어지고, 앉아있고, 누워있고, 뒤집어졌다. 벽장과 방안은 바퀴벌레로 뒤덮였다. 날마다 보는 바퀴벌레 그림 때문인지 나는 이언뿐만 아니라 바퀴벌레와도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설거지를 하려던 나는 싱크대 하수구에 더듬이를 살살 흔들며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보았다. 손을 털면서 괴성을 질렀다. 수돗물을 있는 대로 틀었고, 국자, 플라스틱 접시, 숟가락, 가위, 젓가락 등을 하수구로 마구 집어던졌다. 이언이 놀라 방에서 뛰쳐나왔다. 나는 바퀴벌레가 나타났다며 빨리 잡아 죽이라고 소리쳤다. 이언의 얼굴이 하얘졌다. 가만히 서서 두 손을 깍지 끼며 안절부절못했다. 가족을 어떻게 죽이느냐고 웅얼거렸다. 나는 집안에 살아있는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게 모두 이언 탓 인양, 아니 이언이 마치 바퀴벌레인양 이언을 쏘아보며 발을 굴렀다. 가만히 있지 말고 바퀴벌레 약이라도 사 오라고 닦달했다. 슬며시 집을 나갔던 이언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벽장에 올라온 이언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어깨동무를 하며 내가 바퀴 가족의 큰딸과 닮았다고 말했다. 큰딸로 살아 본 적이 없는 나는 무덤덤했다. 어깨를 흔들고 이언의 팔을 밀쳐냈다. 이언은 완성된 바퀴 가족 만화의 한 장면을 들고 와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나는 큰딸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진갈색의 반질반질한 외피부터 싫었다. 아버지를 닮아 가무잡잡한 나는 맑고 흰 피부를 갖고 싶었다. 피부가 깨끗하면 속이야 어떻든지 일단 좋아 보였다. 그렇더라도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인정했다. 이언은 완성된 그림을 벽에 붙여놓기 시작했다.

나는 벽에 붙인 바퀴 가족 만화를 읽었다.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킥킥대다가, 화내다가, 힘이 빠지다가, 심각하다가, 격렬하게 제자리 뛰기를 했다. 가족 나들이를 가거나 생일파티 이야기를 쓸 때 이언의 얼굴은 밝았다. 할머니가 죽은 날이거나, 아버지가 아플 때는 이언도 시무룩하니 말이 줄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이언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살짝만 웃어도 입속의 덧니가 보였다. 덧니는 이언의 다른 매력이었다. 나는 이언의 덧니가 좋다며 좀 더 많이 웃으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언이 웃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는 만화를 읽으면서 연필심 소리를 들었다. 슥슥슥. 그 소리는 마치 바퀴벌레가 벽장 문틈으로 지나가는 소리 같았고, 부서진 의자를 고칠 때 내가 했던 사포질 소리와 비슷했다.

"내 촉을 피할 순 없어. 이 시신이 만화 그린다는 남자친구지? 어쩐지 요즘 수상쩍다 했어. 못 마신다던 술까지 마시자고 할 때 알아봤지."

송은 사뭇 시비조로 속을 긁었다. 블라인드를 들어 창문틀에 붙여놓은 손바닥 크기의 바퀴 가족 그림을 가리키며 솜씨는 있다고 말했다. 마치 자신이 전문가인 것처럼. 나는 흠칫했지만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거짓을 말하자니 찔렸고, 참을 말하기는 싫었다. 이럴 땐 침묵하는 게 대수였다. 사실 거짓과 참이 무엇인지도 헛갈렸고 경계도 애매했다. 내게는 절실한 이언의 일이 송에게는 쓸데없는 오지랖일 테니까. 누구에게는 참이 누구에게는 거짓일 수도 있었으니까.

내 손등에 송의 손이 스쳤다. 나는 움찔했다. 송이 메스를 쥐고 있어서였다. 몸을 뒤로 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팔을 뒤로 돌려 이언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나는 포르말린이 들어간 정도도 잴 겸 잡은 이언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와 손톱 왼쪽에 단단한 못이 박혀있고 패어 있었다. 연필을 쥐고 날마다 그림을 그리던 손가락이었다. 손을 등 뒤로 돌리고 뭐 해요. 송이 빈정대면서 물었다. 손을 놓고 몸을 돌리던 나는 발뒤꿈치로 탁자를 찼다. 바퀴가 고정되지 않은 탁자가 흔들리면서 뒤로 밀려났다. 저것 봐. 정신 못 차리고 있다니까. 나는 이언과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송은 이언의 목에도 캐뉼라를 꽂고, 고정 중인 할아버지 시신도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오늘따라 사사건건 지적하는 송을 나는 슬쩍슬쩍 째려보았다. 목이 칼칼하더니 흙을 갈아 부수듯 거친 가래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렸다. 마스크를 내리고 휴지에 가래를 뱉었다.

나는 메스를 들었다. 이언이 누운 스테인리스 침대로 갔다. 미세한 주름이 잡히고, 주근깨가 박힌 이언의 목 가운데에 목울대가 산처럼 솟아올라있다. 목울대를 지나 턱과 입 주변이 푸르스름했다. 나는 메스를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이언의 턱과 목의 언저리에서 손이 머뭇거렸다. 오른팔의 상두박근, 이두박근, 삼각근이 모두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깨까지 힘이 들어가 딱딱해졌다.

"프로답지 않게 왜 이러시나. 공시인은 겁먹을 때 섹시하단 말이야."

송이 내 손을 잡았다. 순간, 나는 메스를 놓쳤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지는 쇳소리가 차가웠다. 오른손 검지 끝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회색 바닥에 핏방울 무늬가 점점이 찍혔다. 나는 왼손으로 집게손가락 끝마디를 움켜잡았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메스를 잡고 남자친구 생각을 하면 어떡해? 빨리 끝내자고. 송은 말없이 새 메스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하긴 손가락 좀 베었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메스를 받아 든 손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피는 메스의 날을 따라 내려갔다. 왼손으로 나는 이언의 목울대 옆을 눌렀다.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금방이라도 숨을 내뱉을 것 같은 목을 메스로 그었다. 지방질이 없는 목에서는 혈관 찾는 일이 수월했다. 끄집어낸 혈관을 타고 피가 목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피 범벅이 된 손으로 나는 이언의 목 혈관에 캐뉼라 주삿바늘을 꽂았다. 링거 관에 연결된 레버를 조금만 열어 포르말린을 소량씩 주입했다. 몸에 생긴 상처를 감춰주는 게 내가 이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이언이 수목원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거절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땐 내 몸이 너무 아팠던 거는 너도 알지 않느냐고, 한 번 더 가자고 말하지 그랬냐고, 스케치는 잘 되더냐고, 만화를 납품하기는 한 거냐고, 가방에 든 바퀴 가족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혼자 말하기는 방부 처리실의 시신들과 소통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은 아니었다. 만화가 끝나간다면서 불안해하고,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있던 이언은 바퀴 가족과 헤어지면 속이 시원할지, 아쉬울지, 그리울지, 아무렇지도 않을지, 같이 죽고 싶을지 모르겠다며, 아버지가 죽었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었다. 나는 이언의 감겨진 눈꺼풀을 쓰다듬으며 뻐근하면 부르라고 당부했다.

"순대나 먹고 하지."

"혼자 드세요. 전 됐어요."

"먹고 해. 자꾸 실수하다가 사고 치지 말고."

송이 시계를 보면서 빨리 갔다 오자고 재촉했다. 출장 간 과장 대신 회의에도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송에게 이끌려 할머니 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나와 송을 보고 양은 쟁반에 순댓국 두 개를 내왔다. 할머니가 걸을 때마다 머리에 쓴 빨간 산타 모자의 방울이 흔들렸다. 귀여운 산타 모자 밑의 얼굴엔 깊은 주름이 가득했으나 많이 먹으라는 목소리는 우렁찼다. 나는 순댓국에서 솟아오르는 김을 바라보았다. 고춧가루가 듬뿍 든 국물은 아직도 끓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것을 싫어했고, 입맛도 없었고, 배도 고프지 않았고 무엇보다 순대와 내장, 뼈를 보기가 싫었다. 숟가락도 들지 않고 멀거니 뚝배기만 보고 있자 송이 다이어트라도 하느냐고 물었다. 더 빠질 살도 없는 나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일하려면 속이 든든해야 한다며 송은 으흐, 으흐 소리까지 내가며 순댓국을 비웠다. 무심결에 풋고추를 집어먹었다가 나는 그대로 뱉어냈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물 한 컵을 단숨에 마셨다. 헉헉거리는 나를 보며 송은 청양고추인 줄 몰랐느냐며 낄낄댔다. 송에게 눈을 흘기고 나는 식당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갈색 바퀴벌레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엉겁결에 다리를 내밀어 밟으려던 나는 주춤했다.

이언은 내가 퇴근을 해 집에 왔는데도 벽장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림에 몰입해 내가 집에 왔다는 것을 모를 때도 있었다. 이건 반칙이야. 벽장에 누워 피곤을 풀려던 나는 이언의 연필을 빼앗았다. 이언이 헤드램프를 벗겨내면서 나를 보았다. 눈빛이 맑았다. 맑은 눈을 보며 나는 벽장에서 나가라고 고갯짓을 했다. 이언은 다른 연필을 집어 그림을 그렸다. 나는 다시 비켜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이언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나는 벽장으로 비집고 올라가 이언을 벽장 밖으로 밀어냈다. 중심을 잃은 나도 같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꼬리뼈를 찧은 나는 방바닥을 발로 찼다. 이언은 다시 벽장으로 올라가 그림을 그렸다.

결국 나는 벽장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만화책을 보았다. 이언은 그림을 완성하면 가장 먼저 내게 보여주었다. 삐쩍 마르고 사각 턱인데다 무뚝뚝하지만 너는 나의 첫 번째 독자야. 나는 재미있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여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했다. 버려진 물건을 주워다 고치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 곱슬머리라 비를 맞으면 괴물이 된다는 것, 발바닥에 티눈이 있어 달리기를 못한다는 것까지. 물론 엄마의 얼굴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언은 인내심을 가지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엄마 이야기를 할 때는 내 손을 오랫동안 잡아주기까지 했다. 나는 진정한 가족을 만든 것 같았다.

바퀴 가족 만화를 탈고한 날, 이언은 걸레질을 했다. 바퀴벌레가 나온 싱크대 주변은 여러 번 닦았고 벽장 구석 어두운 곳에 쳐진 거미줄도 거둬냈다. 벽장이 깨끗해질수록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벽장 문턱에 걸터앉아 문틀과 손잡이, 모서리를 닦는 이언을 지켜보았다. 몸부터 닦지, 라는 말을 삼켰다. 의자를 뒤집어 다리 밑바닥까지 닦을 때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라며 걸레를 잡아챘다. 걸레를 뺏으려고 달려드는 이언과 밀고 당기는 바람에 걸레가 찢어졌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걸레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이언은 쓰레기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버려지느니 먼저 버리겠다고 중얼거렸다. 더러워진 걸레처럼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열린 벽장문에 등을 기대고 손을 털었다.

이언은 바퀴 가족 만화를 납품하러 갔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나 나는 오랜만의 외출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이언의 검은색 가방이 그대로 있고, 벽에는 이언이 붙인 바퀴 가족이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벽장 안에는 망친 그림들도 수북했다. 외출한 지 삼일 째 되던 날, 나는 검은색 가방을 열었다. 박제된 바퀴벌레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벽장 바닥엔 뭉뚝해진 몽당연필이 굴러다니고, 지우개 떡이 뭉쳐있고, 연필 깎던 칼이 나뒹굴었다. 나는 벽에 붙은 바퀴 가족 만화를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방안을 빙빙 돌아 처음 시작한 만화로 되돌아오기를 여러 번, 더 읽을 만화가 없었다. 만화책이 출간되면 사인한 첫 번째 책은 내 몫이라더니. 그제야 나는 주먹으로 머리통을 쳤다. 내가 만든 가족들은 떠날 때 예고한 적이 없었다. 이언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한 내가 멍청했다. 벽장에 올라가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방부처리실로 돌아온 나는 손부터 씻었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벽장문을 열었다. 벽장 칸칸마다 누워있는 카데바에 글리세린 처리를 해야 했다. 오랫동안 공기에 노출된 카데바의 피부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뒤처리였다. 제일 아래쪽 칸부터 열었다. 평온한 얼굴이 쓱 나왔다. 하얗게 센 머리칼이 가지런히 머리 뒤로 넘겨져 있었다. 눈을 감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카데바에게 이젠 일어나셔야죠.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미쳤지. 아주 정신이 나갔어. 중얼거리며 나는 글리세린을 듬뿍 떴다. 나는 왜 말하지 않는, 아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말을 걸까. 살아있는 사람들과는 왜 친해지지 못할까. 글리세린을 카데바의 가슴에 부었다. 가슴을 시작으로 목덜미와 얼굴을, 다시 배와 다리 등 몸 구석구석에 글리세린을 바르고 문질렀다. 고맙죠? 마사지도 해주고. 떨떠름하게 또 말했다. 말해야지. 메아리도 들리지 않지만 말해야지. 내 말은 어디까지 가닿을까. 스테인리스 침대 주변에도 가지 못하고 말까. 나는 별안간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에 화가 나고, 아무도 듣지 않는데 끊임없이 말을 거는 내가 수치스러웠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야 할까, 생각했다.

해부학과 조교가 들어왔다. 검은 비니를 쓰고 검은 바지에 검은 패딩을 입어서인지 섬뜩했다. 창백한 얼굴의 조교는 프래시 카데바 준비에 문제는 없는지 물었다. 월요일 워크숍은 펀드를 따느냐 마느냐가 걸린 중요한 워크숍이라면서. 커피를 마시던 송은 준비가 다 끝났다고 큰소리부터 쳤다. 지금 저렇게 큰소리칠 때인가. 나는 송을 흘깃거렸지만 조교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방부 처리실에서 나갔다. 승강기를 기다리면서 옷을 탁탁 털었다. 이곳에 들어온 외부인은 너나없이 나갈 때 옷을 털고, 머리를 털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박박 씻었다. 그리곤 거울 앞에서 검지로 코밑을 강하게 문질렀다. 날마다 방부 처리실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재계약 공지 났어요? 나는 무감하게 물었다. 송은 오늘부터 개인별로 메일이나 문자가 간다니까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과장 대신 저녁 회의에 참석하러 송도 나갔다. 나는 가운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은 하루 종일 잠잠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식곤증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었다. 창문틀에 이언이 그린 바퀴 가족 만화 열 컷이 붙어있었다. 북창 너머는 어두웠다. 블랙홀처럼 거대한 어둠이 금방이라도 나를 훅 빨아들일 것 같았다. 유리창에는 고정 중인 이언의 모습과 내 얼굴이 겹쳐져 유령처럼 떠있었다. 창문틀에 붙여진 바퀴가족 그림이 나와 이언을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유리창에 떠 있는 이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이 닿은 것은 차가운 유리였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어쩌면 둘 다 진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이언도 나도 가짜일지 몰랐다.

불현듯 이언은 나를 떠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창에 비친 이언, 스테인리스 침대에 누워있는 이언, 내 기억 속의 이언은 같았다. 무엇보다 바퀴 가족 만화를 탈고한 이언의 복잡했던 표정은 잊히지 않았다. 이언은 아버지처럼 시커먼 돌덩이가 아니었다. 초록, 빨강, 노랑으로 생생하게 살아난 이언의 모습이 무채색인 방부 처리실 풍경에 툭툭 생기를 던져 주었다. 이언과 풍선껌을 씹으며 누가 풍선을 더 크게 부나 내기하던 일. 하이파이브를 하다가 이언이 손을 빼는 바람에 내가 이언에게 안겼던 일. 커피 한 잔을 같이 나눠마시던 일. 나는 손에 묻은 글리세린을 닦아내고 스테인리스 침대로 다가가 이언을 내려다보았다.

이언의 고정은 끝나 있었다. 여전히 입은 다물고 눈은 감았지만 경직됐던 손이 나긋나긋해졌고 뻣뻣했던 피부가 부드러워졌다. 나는 포르말린 펌프 통을 잠그고 이언의 허벅지와 목에서 캐뉼라를 뽑았다. 펌프 통을 벽 쪽으로 바싹 붙여 놓았다. 고정 완료 시간, 총 고정 시간, 포르말린 주입량을 서류에 기록했다. 이언의 발목에 묶인 ㅇ-12A 인식표를 다시 조였다. 새 이름이 마음에 들어? 발목에 달린 이름이라도 있는 게 좋지. 나는 스테인리스 침대를 밀고 한 동짜리 미니 아파트 같은 벽장 앞으로 갔다. 온전히 이언만을 위한 벽장이었다.

나는 창문틀로 다가가서 바퀴 가족 그림을 모두 떼어냈다. 그림 뒷면에 붙인 양면테이프가 지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무언가가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떼어낸 바퀴 가족 그림을 이언이 누운 스테인리스 침대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바퀴 가족은 이언을 보고 웃거나, 화를 내거나, 침통해 하거나,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화난 표정의 바퀴벌레 그림을 집어 이언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내 기분이야. 예고도 없이 시신을 기증하는 건 파울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뒤집어 이언의 눈을 가렸다. 이어서 더듬이 하나가 잘려나간 바퀴벌레, 웃다가 배가 터진 바퀴벌레, 너무 빨리 달리다가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진 바퀴벌레를 보여주며 이언이 해줬던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들려줬다. 이야기를 마치면 그림으로 이언의 몸을 덮었다. 바퀴 가족과 누워있는 이언의 손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고 짧게 입을 맞췄다. 벽장문을 열고 맨 밑 칸을 잡아당겼다. 오늘 밤은 바퀴 가족과 같이 지내고, 내일 다시 보자고 말했다. 이언을 벽장에 넣었다. <끝> 김수영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