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정유년도 이제 막바지. 곧 제야(除夜)의 그 진한 아쉬움을 견뎌야 한다. 예전엔 그 해 마지막 날은 으레 밤샘하는 날이었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어른들의 으름장에 놀라 쏟아지는 잠을 애써 막아내곤 했다.

제야의 밤샘 풍습은 그 집안의 부뚜막을 지키는 조왕신(竈王神)과 관련이 있었다. 조왕신에겐 고약한 역할이 하나 있었으니 가족들의 잘못이나 과실을 기억하였다가 그 해 12월 24일 밤이면 하늘로 올라가 상제에게 알렸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 상제가 내린 벌을 가지고 집으로 내려오니 사람들은 집안 구석구석 등불을 밝히고 경건하게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며 밤샘을 해야 했다. 하늘이 내리는 벌은 사람의 수명을 깎는 것. 눈썹이 하얘진다는 건 하루밤새 노인이 되어 수명이 줄어드는 큰 벌이었다. 그런데 12월 24일 밤은 산타클로스가 굴뚝 타고 집으로 오는 날. 게다가 조왕신도 빨간 색의 옷을 입고 있었으니 의외로 조왕신과 산타클로스는 꽤 가까운 사이였다.

우리 역사에 또 다른 밤샘 풍습이 있었으니 바로 `수경신(守庚申)` 신앙. 도교(道敎)의 장생법(長生法)에 유래한다. 사람의 몸에는 세 마리의 벌레가 있으니 이름은 팽거 팽질 팽교 이른바 삼시충(三尸蟲). 그들의 역할 역시 기생하고 있는 주인의 악행을 상제에게 고해바치는 일이었다. 그 보고일은 60일마다 돌아오는 경신일(庚申日)이었고 결국 일 년에 6번의 정례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삼시충은 그 주인이 잠이 들어야 몸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그 벌레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는 아예 그 날 24시간 내내 잠을 자지 않아야 했는데 그것을 `수경신` 즉 경신일을 지킨다고 했다. 말하자면 고자질을 원천봉쇄하는 작전이었다.

인간의 수명은 원래 120년. 경신일을 지키지 못하면 상제가 내린 판결만큼 그 사람의 수명이 단축된다. 선고 형량은 그 죄질에 따라 최고 300일에서 최하 3일. 일 년 사이에 1800일의 수명이 줄어들 수도 있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잠깐 졸아도 헛일이 되는 이 밤샘행사는 독서나 대화만으론 어림없는 일. 자연히 술과 노름이 끼어들었고 심지어는 자기 집을 불태우고 구경하며 잠을 참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 충렬왕이 경신일에 밤샘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궁중에서의 수경신 행사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그 해 마지막 경신일은 꼭 지켰다 하며 점차 환락을 위한 행사로 변질되어 갔다. 성종은 이를 말리는 신하에게 `내가 삼시충을 겁내서 밤을 새우겠는가. 다만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다`라며 강행했고 연산군 3년 11월엔 왕이 `오늘은 경신일이니 함께 밤샘하고 장난삼아 노름이나 하라`하니 `임금에게 장난이란 없는 일입니다`하며 대간들이 반대했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759년 영조 5년부터는 궁중의 경신일 연회를 폐지하고 대신 등불을 밝히고 근신하면서 밤을 새우게 했다. 고려 이후 민간에서도 널리 퍼진 풍습이었고 지금도 이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제 이름조차 낯선 도교가 그리도 염원했던 `불로장생`은 오늘날 실로 놀랍도록 성취되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빠른 세월`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다. 제야의 밤샘 풍습은 이제 추억 속에 남았을 뿐이지만 연말의 도심 밤거리는 여전히 잠을 잊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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