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에 러시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주권 선언을 채택하면서 구소련의 붕괴가 시작됐다. 이듬해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사임하면서 붕괴가 완성된다. 구소련의 붕괴는 전 세계적으로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도 2005년 의회에 보내는 교서에서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붕괴 후 사회복지, 경제, 보건 등 모든 시스템이 작동 불능이었고, 국방 또한 아주 열악한 상태였다고 한다.

여러 면에서 수십 년간 유지되고 있던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그 기능이 마미가 되니 이러한 결과는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이는 중앙정부에 의지하고 있던 구소련 구성 공화국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된다. 결론적으로 구소련의 붕괴가 20세기 지정·지경학적 최대 재앙이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또 하나의 재앙 아닌 재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러시아어의 지위문제이다. 구소련 붕괴 전에 러시아어는 구소련에서 자유롭게 반드시 구사해야 할 언어였다. 그래서 소연방 구성 국가의 학교 교육에서 러시아어는 당연히 배워야 하는 것으로 여겼고, 또 반드시 필요했다. 구소련 붕괴이후에도 타 공화국에서의 러시아어의 지위는 지속적으로 유지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러시아어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구소련 국가들이 발생을 한다. 예를 들면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산부인과에 외국인 산모들이 많이 와서 출산을 한다고 한다. 외국인 산모들이다 보니 당연히 통역사가 필요한데, 재미있는 점은 영어나 프랑스어 통역사가 아닌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 구소련 연방 국가의 통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이었다. 구소련 해체 후 27년 만에 러시아의 산부인과를 찾은 일부 구소련 국가 출신 젊은 산모들의 대다수가 러시아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구소련 붕괴이후 공교육에서 러시아어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구소련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한 표현이 아니라면 러시아어로 소통할 수 있는 국가의 수가 줄어든다면 러시아어를 공부한 사람들에게도 문화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와 활발히 교류 중에 있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스탄 5형제 국가가 있다. 올 여름 14박 15일간의 여정으로 중앙아시아를 다녀왔는데, 평소 구소련 붕괴이후 스탄 5개국에서의 러시아어 지위가 궁금해 했던 터라 이번 여정을 통해 이들 국가에서 러시아어의 지위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고자 한다. 구소련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러시아어가 통용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구소련 붕괴 후 27년이 흘렀고, 이 기간 동안 일부 국가에서는 러시아어가 통용되지 않고 있어 만약 27년 전부터 이들 국가의 공교육에서 러시아어 교육을 소홀히 했다면 27년 전 태어난 아이들부터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들 국가에서 러시아어로 의사소통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약 90% 이상의 시민이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할 줄 안다고 해도 무방하다.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마을에서 자란 7-8세 정도의 초등학생과도 러시아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이는 러시아어에 대한 공교육이 잘 돼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중앙아시아 국가들 모두 마트나 공항 등지에서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에게는 러시아어로 현지어를 하는 사람에게는 현지어로 응대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이중 언어를 할 줄 안다는 점이 부럽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현지어를 우선적으로 말하고 차선으로 러시아어를 선택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앞으로 30-40년 후에 이들 국가들에서 러시아어 지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아르메니아가 급진적으로 러시아어를 없애려고 하는 국가 중 하나인데,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어를 급진적으로 없애려고 하는 움직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들 국가들이 러시아어의 중요성을 인식해 러시아어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점에 많이 고무적이다. 러시아어가 민족 공용어로서의 필요성을 느끼는 기존의 구소련 구성 국가들의 러시아어 정책이 축소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가 타 공화국에서 필수냐 선택이냐의 문제에서 필수로 되기를 기원해 본다.

김태진 배재대 러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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