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에 칼럼 부탁을 받고 가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있었다. 장자(莊子) 천도편(天道篇)의 `윤편`(輪扁)의 이야기이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이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환공에게 묻는다. "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성인(聖人)의 말씀이니라." "그 성인은 지금 살아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느니라." "그렇다면 왕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糟魄, 조백)입니다." 왕은 크게 노하여 윤편에게 합당한 설명을 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윤편은 이렇게 말한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기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의 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 깎고 덜 깎는 것은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로부터 전수받을 수 없습니다."

조백(糟魄)은 술 찌꺼기이다. 술 찌꺼기는 술은 아니지만 그것을 먹으면 술을 마신 듯 취기가 오르게 된다. 윤편은 성인의 글을 읽고 있다고 내가 곧 그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착각, 즉 거짓 취기를 지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거룩한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손끝의 감각으로 전하는 것, 즉 성인의 삶을 내 삶의 고유한 환경 안에서 구체적으로 재현해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에 대한 공부나 모방(模倣)이 아니라 `따르라`고 부르셨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비움과 희생을 통해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그분의 삶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술을 마시며 참된 기쁨 속에서 살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현혹시켜 술을 찾지 못하게 안주하게 만드는 술 찌꺼기들이 있다. 커다란 행사나 뛰어난 행정능력, 감동적인 설교나 기적까지도 `술`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외적인 성장이나 화려함 등을 하느님의 은총이나 사랑의 결과물로 생각하고는 한다. 만일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생을 마감하신 예수님은 가장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지 못하신 분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세례, 성경 말씀, 그리고 여러 가지 신앙 행위들 자체를 술로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이것들을 절대시 할 때 세례, 성경 말씀, 그리고 여러 가지 신앙 행위들 안에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며 단죄하거나, 때로는 일반 상식으로는 받아들기 힘든 폭력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된다. 예수님의 비판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바리사이`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구분하다, 분리하다.`라는 말에서 왔다. 이들은 선인과 악인,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끊임없이 구분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가 되길 원하셨고(요한 17,21), 죄인인 세리와 창녀, 접촉 만해도 부정해진다고 여기는 이들인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를 받치신 걸 보면 오히려 저 죄인들을 위해서 제가 대신 지옥에 가겠다고 기도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에 더 가깝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손끝에서 완성이 된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없는 모든 행위는 술 찌꺼기이고,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참된 구원과 변화는 바로 이 손끝에 달려있다. 자신을 비우시고 희생해 나가는 따뜻한 손끝들이 모여 이 세상에 참된 변화와 구원이 오길 기도해본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20,34)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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