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백(糟魄)은 술 찌꺼기이다. 술 찌꺼기는 술은 아니지만 그것을 먹으면 술을 마신 듯 취기가 오르게 된다. 윤편은 성인의 글을 읽고 있다고 내가 곧 그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착각, 즉 거짓 취기를 지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거룩한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손끝의 감각으로 전하는 것, 즉 성인의 삶을 내 삶의 고유한 환경 안에서 구체적으로 재현해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에 대한 공부나 모방(模倣)이 아니라 `따르라`고 부르셨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비움과 희생을 통해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그분의 삶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술을 마시며 참된 기쁨 속에서 살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현혹시켜 술을 찾지 못하게 안주하게 만드는 술 찌꺼기들이 있다. 커다란 행사나 뛰어난 행정능력, 감동적인 설교나 기적까지도 `술`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외적인 성장이나 화려함 등을 하느님의 은총이나 사랑의 결과물로 생각하고는 한다. 만일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생을 마감하신 예수님은 가장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지 못하신 분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세례, 성경 말씀, 그리고 여러 가지 신앙 행위들 자체를 술로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이것들을 절대시 할 때 세례, 성경 말씀, 그리고 여러 가지 신앙 행위들 안에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며 단죄하거나, 때로는 일반 상식으로는 받아들기 힘든 폭력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된다. 예수님의 비판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바리사이`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구분하다, 분리하다.`라는 말에서 왔다. 이들은 선인과 악인,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끊임없이 구분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가 되길 원하셨고(요한 17,21), 죄인인 세리와 창녀, 접촉 만해도 부정해진다고 여기는 이들인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를 받치신 걸 보면 오히려 저 죄인들을 위해서 제가 대신 지옥에 가겠다고 기도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에 더 가깝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손끝에서 완성이 된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없는 모든 행위는 술 찌꺼기이고,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참된 구원과 변화는 바로 이 손끝에 달려있다. 자신을 비우시고 희생해 나가는 따뜻한 손끝들이 모여 이 세상에 참된 변화와 구원이 오길 기도해본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20,34)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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