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 생활을 했던 효종은 재위기간 내내 복수설치, 즉 청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기 위한 정책기조를 유지했다. 그는 재위 10년 3월 11일 승지와 사관도 물린 채 송시열과 담판을 벌였는데 송시열은 이를 `악대설화`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화한 포병 10만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가 예기치 못할 때에 관으로 쳐들어 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이덕일, 2010).

효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은 `도전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욕망(Lust)`과 `공모(Complicity)`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충성스럽고 덜 공격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불의에 관심을 가지며, 사회의 규칙과 관련된 반사회적 요소도 있다. 이들은 자기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상에게 충성을 바치고 위해를 가한 자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효종은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623년 5세 때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가의 일원이 되었고 인조 4년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그는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볼모 길에 세 살난 딸이 병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청나라에 가서는 소현세자와 함께 명·청(明淸) 간의 전쟁터를 따라다녀야 했는데, 청이 남쪽의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나서기도 했으며, 서역을 공격할 때에는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하여 그를 보호했다"(인물한국사).

효종의 이런 태도는 에니어그램 8번 유형이 보호해야 할 대상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며, 그가 형인 소현세자를 넘어서 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1645년(인조 23) 4월 26일 인질생활에서 귀국한 세자가 34세의 나이로 급서하자, 인조는 원손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는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세자가 된 그는 1649년(인조 27)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원손의 자리를 대신한 효종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형수 강빈을 신원해야 한다는 여론에 시달렸다. 그러나 강빈이 신원되면 자신의 자리도 위태로워질 것이므로 효종은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논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대처했고 즉위의 정당성을 북벌, 즉 청에 대한 복수에서 찾고자 했다. 이것은 8번 유형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는 방법과 난국에서 돌파구를 여는 지략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는 8번 유형답게 인질생활 기간과 귀국 후에도 인조를 포함한 자신의 주변과 적정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예고없이 다가온 임금의 자리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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