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부산물이다

지구상에 출현해 수만 년의 시간을 관통해오는 동안 인류는 적응과 진화를 거듭해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개척해 지금에 이르렀다. 수 많은 역사학자들이 인류세라고 부르는 지금의 시대는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올라선 인류의 위치를 확고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금의 인류를 이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을까.

`문명은 부산물이다`의 저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여섯 가지의 문명을 제시한다. 인류가 이 여섯 가지의 문명을 손에 넣음으로써 침팬지, 고릴라와 갈라져 인류라는 이름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지구에서 가장 치명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여섯 가지는 족외혼제, 농업, 문자, 제지, 조판인쇄, 활자인쇄다.

저자는 족외혼제가 사회제도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제도적 장치이며 역사학, 인류학, 생물진화학 등 전방위적인 인문학 지식들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무기의 발명으로 인해 일부일처제를 취득한 인류가 보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후대를 낳아 궁극적으로 현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족외혼제에 있다. 집단을 꾸리게 된 인류는 동일한 가계 혹은 친인척 간의 결합을 금지하고 외부에서 배우자를 맞아들임으로써 극적이고 거대한 형질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적응과 진화의 궤도에 인류를 올려놓고 강한 신체와 이성이라는 제트엔진을 장착시켰던 그 시발점이 바로 족외혼제인 것이다.

또 원시 인류는 채집과 사냥을 통해 생존했다. 하지만 이후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항구적 정착, 식량의 저장과 비축, 인구 급증, 노동분업과 사회계층의 분화, 그리고 최종적으로 복잡한 계급사회가 도래했다. 농경의 시작은 인류의 문명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대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류는 왜 농업을 시작했는가.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농경생활은 결코 수렵-채집 생활보다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파종과 수확 사이의 기간 동안 식량 부족으로 인해 생존 자체에도 위협을 받는다.

특히 100만 년이라는 언어의 역사에 비해 고작 1만 년도 채 되지 않은 문자라는 신생아는 인류의 운명을 혁신적으로 바꿔 놓았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장 자크 루소, 헤겔, 소쉬르 등이 밝힌 문자와 언어에 대한 고찰을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해 이집트의 성각문자, 서아시아의 설형문자, 중국의 갑골문 등의 흔적을 쫓는다.

제지와 조판인쇄를 거쳐 이 책의 기나긴 여정은 활자인쇄에서 마무리된다. 이 장에는 중세의 유럽과 동시대의 중국, 한국을 오가며 활자인쇄를 둘러싼 전방위적인 역사의 흐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 인류의 능력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막강하다. 하지만 날로 커지는 인류의 능력이 만든 자신감은 이 세계의 많은 문명들이 목적적 행위의 산물이라고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이런 터무니없고 비실제적인 생각을 뒤엎고, 문명은 곧 부산물이라는 이론으로 인류 문명사의 목적론적 해석을 대체한다.박영문 기자

정예푸 지음·오한나 옮김/ 378/ 528쪽/ 2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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