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병자년 `남한산성`도 한창 매서운 겨울철이었다. 그리도 `역사`를 하늘처럼 떠받들던 조선이었지만 역사가 주는 교훈은 없었다. 40년 전 임진왜란도 또 불과 9년 전의 정묘호란도 결코 앞날을 대비하는 지혜는 주지 않았다.

중종 13년 8월, 국경 지역을 노략질하던 여진족 무리에 기습을 하자는 안이 굳어지자 당대 사림의 대세 조광조가 끼어들었다. `옛적 제왕은 이적(夷狄)에게도 인과 의로 대하였다. 몰래 기습한다는 것은 사기의 술책이자 도적의 방법이니 나라의 체면만 손상된다.` 기가 막힌 병조판서 유담년이 `옛말에 밭을 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며 군사의 일은 무신에게 묻기를 청했지만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며 없던 일로 하였다. 조광조의 이 성리학적 신조는 선조 이후 조정의 주축이 되는 사림의 신조였다. 어쩌면 그들에게 임진년 이순신의 혁혁한 전공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전술이든 지형지세의 이용이든 그 모두가 사기의 술책이자 도적의 방법에 다름 아니었다. 이순신의 고난은 애초에 예정되어 있었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가는 도중엔 실로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전투가 있었다. 1637년 1월 초 한겨울 경기도 광주 쌍령(雙嶺)에서 있었던 이른바 `쌍령전투.` 놀라지 마시라. 경상도 근왕병 수만의 군사가 청의 3백 기병에게 거의 몰살을 당하니 혹자는 대한민국 전쟁사상 3대 패전의 하나로 꼽는다. 이 전투엔 사림이자 문관 도경유(都慶兪)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경상감사 심연의 종사관이었던 그는 전투 초반 군관 박충겸이 공격을 앞두고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한다. 이에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지고 전세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 급기야 박충겸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화약폭발사고를 일으키며 조선군은 무참히 자멸하고 말았다. 자세한 경과는 줄이기로 하나 군사에 무지한 문신이 제멋대로 지휘에 개입하면서 역사에 남을 패전을 만들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그해 5월 도경유는 유배 가던 중 누군가에게 살해된다.

도경유에 관한 여러 기록은 참으로 어지럽다. 인조 15년 실록에선 `도경유가 박충겸을 참하였다. 접전이 시작되자 경유는 먼저 도주하여 전군이 놀라 궤멸되게 하였으니...` 연려실기술에서는 `사람들은 쌍령의 패전 원인이 모두 경유 때문이라 하였다.` 당시의 지휘관 경상좌병사 허완의 묘갈명에는 `도경유는 제멋대로 행동하여 평소 군사들의 신망을 잃고 있던 자. 그가 공의 말을 듣지 않고 먼저 군관의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겁을 주니 공이 대사는 끝장났다며 탄식하였다.` 그러나 도경유의 묘비에선 이렇게 말한다. `공께서는 군관 한 사람을 나포하여 머뭇거리기만 하는 죄로서 꾸짖고 목을 베어 제군을 독전하니 아군은 사기가 높아지며 다투어 분발하였고 거의 승리를 거둘 뻔하였는데 문득 화약고에서 불이 나자 군이 요란하여지니 드디어 그 틈을 탄 적들에게 패하게 되었다`

대구광역시 서구 와룡산. 한 때 `개구리 소년`사건으로 잘 알려진 그 곳에 도경유와 그의 형님을 제향하는 병암서원(屛巖書院)이 있다. 현대식 건물과 전통가옥을 조화시킨 서원으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전통혼례식장에다 시민들의 야간산책을 위한 조명시설까지 갖춰져 있다. 서원을 현대화하여 활용함에 뭐라 할 일은 못되나 그 해 겨울의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마냥 혼란스러워진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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