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인조 15) 1월 병자호란을 매듭짓기 위한 청(淸)과의 강화협상 결과, 조선 개국 이래 처음으로 세자로서 인질이 된 소현세자는 그해 4월부터 심양에서 8년 간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소현세자는 귀국 직전 북경에서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으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 등을 선물로 받았다. 이때 그는 천주상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아담 샬은 그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고 세자는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신부를 요청하기도 했다"(인물한국사).

소현세자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두려움`과 `의무(duty)`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규칙과 기준을 강박적으로 지키려 하며, 두려움을 지우기 위하여 확실함을 추구하는데 때로는 이것이 추상적인 논리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며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나 청과의 전란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는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청의 과도한 요구에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라며 인질을 자청했다"(이덕일·2010).

당시 패전국의 세자가 인질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에니어그램 6번 유형의 별칭인 `충성가`답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데 따르는 위험을 회피하지 않았다. 이 유형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공포와 공포대항의 특징을 동시에 보이는데 그가 바로 그랬다.

그는 억류생활 중 명·청 교체기의 대륙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 국익을 지키기 위하여 분주했다. 청으로부터 토지를 받아 농사를 지어 그 소출로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하고, 청과의 무역을 통해 재력을 비축하면서 청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이런 세자의 활약은 인조의 의심을 사고 그를 자극했다. 1645년(인조 23) 2월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두 달만인 4월 26일 불과 34세의 나이로 급서해 독살설을 낳았는데, 인조는 시침을 담당한 이형익에 대한 국문조차 거부할 정도였다. 세자의 죽음은 세자빈과 원손의 죽음을 포함해 그의 가족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소현세자의 불운은 에니어그램 6번 유형의 자신의 신념에 대한 강박적인 태도가 전체를 그르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아울러 조선사회를 지배해 온 통치이념인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조선의 내·외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렸다는 점에서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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