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 동시에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바란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소득 증가로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0세를 넘게 된 것에 반해 건강 수명은 여전히 기대 수명보다 15년이나 짧다. 수명은 길어졌으나 성인병이나 만성질환을 앓는 유병 기간은 길어졌다는 뜻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건강 수명이 길어진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인간은 질병과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과 의학의 도움을 받으며 살지만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더 이상 과학이나 의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평화롭게 눈 감기를 원한다. 하지만 주위에서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손에 꼽힐 만큼 드문 이유는 무엇일까. 만수무강(萬壽無疆), 수산복해(壽山福海) 같은 덕담을 주고 받으며 살아있는 동안 건강을 소원하는 문화는 여전하지만 죽음이나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문화는 자리 잡지 못 했기 때문이다. 만성질환으로 수년간 투병하면서도 환자와 가족 모두 인간답고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하지 못 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가 유한한 미래를 얘기하는 것이 아직 서툴다. 장성한 자녀들도 부모와 생의 끝을 얘기하는 것이 불효가 될까 두려워한다.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의사라 할지라도 오랜 기간 본인이 치료해 온 환자에게 죽음을 준비할 것을 권하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난 수 년간 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사회적 요구가 커져왔다. 이에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시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법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의료의 시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취지로 마련됐다. 또 환자의 자기결정을 존중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내년 2월 시행에 앞서 지난 10월 23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시범사업 기간 동안에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으로 선정된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을 중심으로 13개 기관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시범 사업이 끝난 이후 내년 2월 부터는 담당의사는 물론 관련 분야 전문의 1명으로부터 임종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환자는 심폐소생술이나 혈액 투석, 항암제 등의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이제 의학적, 윤리적 판단에 입각해 회생이 불가능한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는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료 현장은 아직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충남대병원은 시범사업 병원으로 선정돼 지난 두 달 동안 이 법을 시행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이 과정에서 법의 취지와 목적을 의료 현장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별한 노력과 광범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병원의 환자들 뿐 아니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해 상담소를 설치하고 전담 상담사를 고용하는 일, 종교계·법조계·윤리학계·시민단체 등의 추천을 받은 사람 2명 이상을 포함해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 야간과 휴일에도 환자와 가족, 담당 의료진의 요청에 응대해 법 절차를 상담해 줄 전담 인력을 양성해 배치하는 일 등은 의료기관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법 자체만으로는 법의 취지가 저절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사회적 요청에 따라 법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지역 국공립 의료기관이 적극적으로 법 시행을 준비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적절한 물적, 인적, 재정적으로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이 법은 품위 있는 죽음이 환자와 환자 가족들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다. 지역 의료기관과 시민사회단체, 지방자치단체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송민호 충남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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