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찬바람이 매섭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80여년 전 우리 춤의 시조 한성준이 서울 창경원에서 학들이 노니는 광경을 관찰하고 학춤을 만들었다는 일화다. 조선의 왕들이 살던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동물원이 됐고 이름도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바꿔 불리었다. 한성준은 왜 추운 겨울 창경원으로 갔을까. 추운 겨울에 보다 다양한 학들의 몸짓을 관찰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학춤 창작과 관련 다음 일화도 흥미롭다. 고향인 충남 홍성 뒷산에 서식하던 학을 잡아다가 온돌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학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무용화했다는 설이 전한다. 홍두깨를 넣어 학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장고장단을 치면서 이에 동요하는 학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춤사위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도쿄에 잡혀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한성준의 학춤을 관람하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한성준 학춤은 손녀딸 한영숙에게 대물림됐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런데 1989년 한영숙 사후(死後) 한성준 학춤은 40호라는 명찰만 그대로인 채 춤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졌다. 궁중정재의 학연화대무로 변경되었고 따라서 한성준 학춤은 무형문화재 제도 선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충남 천안에서 출생한 한영숙은 유년시절 할아버지 고향인 홍성에서 자랐고 갈미보통학교를 다녔다. 어릴 적 심신이 병약했던 한영숙을 한국 최고의 명무로 키워낸 것은 할아버지 한성준이었다. 양 무릎 사이에 계란을 끼고 춤을 연마하는 등 혹독한 수련기를 거쳤다. 수십 년의 노력 끝에 할아버지 한성준이 보유한 춤 전반을 물려받고 공식 후계자로 낙점된다. 일본 지배하에 우리 춤과 가락으로 한반도는 물론 일본, 만주 일대를 누비며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웠다. 승무, 학춤의 인간문화재였으나 안타깝게도 1989년 69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이제 한성준-한영숙으로 이어진 학춤은 완전히 다른 내용의 춤으로 변개되어 무형문화재 제도선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영숙류 춤은 현재 승무 한 종목만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나라의 태평성대를 주제로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상정하고 만든 태평무는 창작 당시 한영숙이 왕 역을, 강선영이 왕비 역을 맡아 2인무로 추어졌다. 왕비 역을 맡은 강선영의 태평무만이 제92호로 지정돼 있다. 1935년 부민관에서 초연된 살풀이춤 역시 한영숙이 맥을 이었으나 국가무형문화재에서는 제외되어 아쉬움을 더한다.

무형문화재 지정에서 가장 우선되는 가치는 역사성과 원형(전형) 보존이다. 충청남도 홍성, 예산, 서산 일대의 이른바 내포에서 발원된 한성준 춤의 미학은 정갈하고 단아한 이른바 중도(中道)의 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설파한 평평하고 온화한 내포의 지형을 그대로 닮은 몸짓인 것이다. 한성준의 손녀딸 한영숙은 내포의 춤전통을 원형에 가깝게 온전히 계승한 거의 유일한 제자였다. 한영숙에게 직접 춤을 배워 이수자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명무들은 이제 70대의 원로세대로 접어들었다.

우리 춤의 시조 한성준의 춤을 ‘본디 그 모습 그대로’ 지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우선, 무형문화재 제도에서 한성준-한영숙 춤에 대한 유파(流派)를 인정해야 한다. 유파란, 오랜 세월 변치 않는 집적된 기예로 일가를 이뤄낸 그 예술적 성취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원형(전형)과 고유미의 올바른 보존 계승이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공청회를 통해 무형문화재 전승자 중 75세 이상의 전수조교를 명예보유자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고령화로 인한 신체기능저하를 이유로, 75세 이상의 전수조교를 보유자 인정 과정을 생략한 채 명예보유자로 전환한다는 발상인데, 법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특정인을 위한 방책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우리 춤 고유의 미학을 지켜온 춤꾼들 대부분은 70대 이상의 원로세대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원형(전형)과 고유미, 정통성에서 벗어난 춤 전승자에게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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