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이 세자시절 자신이 탐하던 여인 `어리`가 태종에 의해 궁궐 밖으로 내쳐지자 몰래 세자전으로 다시 데려왔다. 이 문제로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 5월 세자를 구전(舊殿)으로 쫓아냈는데 세자는 수서(手書)를 보내 항의하기를,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이를 받아들입니까? 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이덕일·2010)

양녕대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피암시성`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삭막하고 평범한 현실보다 나은 무엇인가를 상상한다. 지나치게 열광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삶의 고통, 지루함, 두려움 등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이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정보에만 집착한다.

1394년(태조 3년)에 장차 조선의 3대 국왕이 될 이방원의 장자로 태어난 그는 9세 때인 1402년(태종 2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4세에는 김한로의 딸과 혼인을 하며 순조로운 청년기를 보냈다.

특히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치열한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으나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태종은 비록 정적이었던 정도전이 주창하기는 했으나 스스로가 성리학에 기반한 통치철학을 체득하고자 했으며 후대 왕들에게도 전승되기를 원한만큼 세자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20세를 넘기면서 장성한 양녕대군은 궁궐 안 세자전에 기생과 악공(樂工)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사가에까지 넘나들며 여색과 잡기에 열중하면서 자신의 사부들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여색과 관련된 문제로 부왕으로부터 징죄를 당하자 정면으로 맞서면서 태종의 기대마저도 저버렸다. 그에게는 왕세자에게 필수적인 덕목인 제왕학 학습은 거추장스런 것이었다.

야사는 양녕대군이 자신의 동생 충녕대군의 왕재가 뛰어남을 일찍이 간파하고 세자자리를 양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한 행위라고도 전하나 이것은 에니어그램 7번 유형이 현실의 지루함을 잊기 위해 쾌락을 탐닉하고,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규범이나 가치 등은 괘념치 않는 반사회적인 성향을 표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양녕대군의 부왕에 대한 도전적인 행동은 8번 유형인 태종의 성격특성에 비추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왕의 심중을 파악한 대신들은 곧바로 폐세자를 주청했고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8월 10일에 태종의 선위를 받아 조선의 4대왕으로 즉위했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우리가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하는 세종대왕의 탄생은 이러한 우여곡절을 내포하고 있으니 태종의 혜안과 냉철한 결단이 다시 한 번 번뜩인 결과였다.

양녕대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7번 유형의 탐닉과 지나친 열정에는 사안의 본질을 파악하고 내재된 가치를 읽을 줄 아는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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