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라의 어떤 고을에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선비가 있었으니, 이름을 북곽선생이라고 불렀다. 나이 마흔에 자신의 손으로 교정한 책이 만권이고, 아홉 가지 유교 경전을 부연 설명하여 다시 책으로 지은 것이 일만 오천권이나 되었다. 천자는 그 의리를 가상하게 여기고, 제후는 그 명성을 사모하였다."

박지원의 `호질(虎叱)`에 나오는 북곽선생은 당대 존경받는 유학자로 그의 학문적 업적과 성품이 온나라에 알려져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북곽선생은 미모의 과부 동리자와 밀회를 즐기다 발각된다. 동리자의 아들들은 어머니와 함께 있는 북곽선생을 보고 어진 선비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며, 분명 여우가 둔갑할 것이라 하고 그 `여우`를 죽이고자 달려들었다.

여우로 몰려 죽을 지경에 처한 북곽선생은 달아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미친 사람처럼 흉내를 내다가 결국 똥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간신히 구덩이를 빠져나온 그 앞에 범이 떡 버티고 서있는 걸 본 북곽선생은 살기위해 머리를 조아리며 범 앞에서 아첨을 하였다. 이를 본 범이 호통을 치며 북곽선생에게 일갈을 한 바는 다음과 같다.

"내 일찍이 들으매 선비 유(儒) 자는 아첨 유(諛) 자로 통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대저 제것이 아닌 물건에 손을 대는 놈을 일러 도적놈이라 하고, 살아있는 것을 잔인하게 대하고 사물에 해를 끼치는 놈을 화적놈이라고 하느니라. 네놈들은 밤낮을 쏘다니며 분주하게 팔뚝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남의 것을 훌치고 낚아채려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심한 놈은 돈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장수가 되겠다고 제 아내조차 죽이는 판인데 삼강오륜은 더 이야기할 나위가 있겠느냐! 너희 인간들이 이치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때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거리지만 하늘이 명한 입장에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나 다 같이 만물 중 하나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누에나 벌이나 개미나 사람이나 모두 함께 살게 마련이지, 서로 해치고 어그러질 관계가 아니다. 또 선과 악으로 구별한다면 공공연히 벌과 개미집을 터는 놈이야말로 천지의 큰 도적놈이 아니겠느냐. 제 마음대로 메뚜기와 누에의 밑천을 훔치는 놈이야말로 인의를 해치는 큰 화적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저명한 선비 유학자가 범에게 큰 꾸지람을 듣는 입장이 된 것이니, 한낱 미물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범이 가진 힘이나 폭력성 앞에 무릎꿇고 아부하게 된 마당이니 선비의 지조는 티끌처럼 날아가 버린 지경이 되었다. 범이 북곽선생에게 호통친 내용은 권력에 아첨하는 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바, 돈을 숭상하는 바, 남을 차별하여 우월한 지위를 얻는 바, 약자를 털어 인간적 도리를 저버리는 바로 요약할 수 있다. 군자연한 허세와 헛된 지식자랑으로 명예를 얻으면서, 뒤로는 도적놈이나 화적놈들이 할 짓을 하고 다닌 북곽선생의 진면목을 남김없이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처럼 18세기 양반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허위의식을 폭로하면서 당대 조선사회가 변화하고 지향해야 할 바를 모색했던 실학자였다. 그가 남긴 문집은 물론 소설들은 계급을 뛰어넘어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였으며, 사물을 통찰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들을 질문하는 문제작들이다. 그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비리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속해 있던 양반계급부터 성찰하고 변화하도록 주문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범의 꾸짖음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하며 살고있는 모든 지식인들에 대한 준엄한 질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범의 호통소리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해당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지도층의 부정, 비리, 성추문 등이 끊이지 않으니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또다른 북곽선생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범의 호통에 놀라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던 북곽선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동이 터오도록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북곽선생에게 지나가던 농부가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이른 아침부터 들판에서 절을 하고 계십니까?" 북곽선생의 대답이 걸작이다. "`시경`에 하늘이 높고 땅이 두텁다 하여 만물을 우러러 겸손히 등을 굽히고 있는 걸세." 최혜진 목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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