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설 '유리-어느 아나키스트의…'펴낸 박범신 작가

박범신 신작 장편 `유리`
박범신 신작 장편 `유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아나키스트 유리(流離)는 나의 현신(現身)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유리는 은닉돼 있던 내 꿈의 사실적인 변용이지요."

소설가 박범신(71)이 장편 `유리-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은행나무)로 돌아왔다. 그의 43번째 소설이다. 지난 29일 충남 논산 와초재 근처의 어느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한 쪽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인터뷰 등으로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했다. 작가는 이번 책을 `새로운 길을 열어 준 책`이라고 소개했다.

신작 `유리`는 1915년에 태어나 2015년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 `유리`의 방랑기 속에 한국·일본·중국·대만의 동아시아 100년 역사를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지난해 3월부터 7월까지 모바일 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서 이 소설을 연재하면서 젊은 독자들을 만났다. 9만 명에 달하는 독자들이 모바일 페이지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무겁게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부조리하고 잘못된 구조를 담은 역사 이야기를 젊은 이들에게 해주고 싶었죠. 어렵지 않게 소설에 접근할 수 있게 초반부엔 어드벤처 형식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 번 읽으면 휘리릭 넘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젊은 독자들에게 반응이 좋았죠."

작가는 소설 속 배경을 `짐승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그는 그 시대가 개인의 고유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암흑의 시기라 봤다. 그래서 등장인물들 역시 유리, 걸식, 금이빨 등으로 불린다. 자신의 정체성을 내보일 수 없는 시대여서다.

소설에서 주인공 유리는 어릴 때부터 구렁이와 대화를 하다가 혀가 길어진다. 어린 시절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한 후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친일 앞잡이였던 큰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고 고향을 떠나 만주로 도망가는 내용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의 풍진 여행에서 은여우나 원숭이, 햄스터 같은 동물들이 친구가 돼 어려움에서 구해준다. 그러다 산 속에서 걸식(乞食)을 만나 유리라는 이름을 얻는다.

작가는 고통스러운 시대를 은유와 우화적으로 표현했다. 반(反)인간화하는 시대에 동물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는 은유다. 공간적 배경도 한국을 `수로국`, 일본을 `화인국`, 중국을 `대지국`으로 설정해 판타지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책은 1930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돼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끝난다.

"해방되고 독립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청산되지 않은 잘못된 구조나 문화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다룬 시대 이전에 더 고단했던 유리 아버지의 삶이나 박정희 유신 이후의 이야기도 기회가 되면 쓰려고 합니다."

작가는 유리 이야기도 3부작으로 완성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는 앞서 `갈망 3부작`으로 불리는 `촐라체`, `고산자`, `은교`를 출간해 인간 본원을 탐구했다.

당초 지난해 10월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불거진 문단 성추문 논란으로 연기됐다. 박 작가는 지난 1년 간 일본군 위안부, 6·25전쟁, 유신체제 내용을 추가했다. 340쪽 분량이던 소설은 588쪽으로 늘었다.

그는 지난 1년 간 고통스러웠다고 토로했다.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사회적 자아로서의 박범신은 죽은 거죠. 죽음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술적 자아로서의 박범신의 갈망은 더 컸습니다. 더 이야기 하고 싶진 않지만 당시 같이 있었던 모든 여성분들이 공개적으로 불쾌한 일은 없었다고 말했고 그 사실은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이번 소설을 쓰며 그가 마지막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줬다고 했다.

"44년 작가 인생의 획을 그은 작품이 `유리`입니다. 이야기는 절로 아귀가 맞춰졌고 문장은 손 끝에서 스스로 완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행복한 글쓰기`에 도달했다고나 할까. 글을 쓸수록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아나키스트 같은 삶을 투영했고 나 역시 소설가로서의 삶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강은선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충남 논산의 어느 식당에서 만난 박범신 작가는 이번 신작 `유리`에서 주인공 유리는 아나키스트를 꿈꾸는 자신을 투영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강은선 기자
충남 논산의 어느 식당에서 만난 박범신 작가는 이번 신작 `유리`에서 주인공 유리는 아나키스트를 꿈꾸는 자신을 투영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강은선 기자

강은선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