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기 교수
이원기 교수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명의 정객이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금단의 도시`에서 거래의 기술을 선보였다. 그 중 한 명은 스스로 거래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지 `거래의 기술`에 대한 책을 낸 바 있고, 상대방 역시 밑지는 거래는 하지 않으려는 듯 거래의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회담 장소를 `금단의 성(자금성)`으로 택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상대를 위해 평소 인파로 들끓는 천안문 일대를 개미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황제처럼 대접했을뿐더러 어마어마한 선물까지 안겼으니 그 역시 거래의 달인이라고 일컬어야 마땅하다.

학술포럼으로 `금단의 도시` 북경을 너댓 차례 다니는 동안 보고 느낀 것들 중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긴 일들을 되새겨 본다.

북경은 나에게는 쾌적하지 못한 곳이자 뭔지 모를 수수께끼를 지닌 도시로 다가왔다. 북경은 먼지가 심해서 조석으로 살수차가 물을 뿌린다. 먼지가 많은 이유는 거대한 도시 규모에 비해 큰 강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시의 기온은 상상 밖으로 높다.

또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도시가 광대한 벌판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방어의 개념이 달라진 오늘날은 그렇다 치고, 원나라의 세조(쿠빌라이 칸) 때부터 명, 청을 지나는 동안 허허벌판에 도읍을 세우고 살아갔던 과거 왕조들의 셈법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세계 2대 강국의 수뇌가 회담을 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만, 왜 하필 자금성이고 만찬까지 즐겼는지의 여부가 회담이 마뜩치 못한 이유일 것이다.

그 핵심에는 `난정서(蘭亭序)`가 있다. 모사본(模寫本)일망정 자금성 내 고궁 박물관에서 서성 왕희지의 난정서를 본 순간의 감격은 아직도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걸물로 꼽히는 당태종이 난정서와 서첩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면 그 가치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특히 북경에서 중국의 저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느끼게 만든 것 가운데 하나가 만리장성이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때가 기원전 221년이었으니, 거의 2300여 년 전 그 불가사의한 일을 해낸 중국인들의 마음가짐은 천하일품이라 하겠다. 맨몸으로 걸어서 올라가기도 힘들고, 그냥 서 있기도 겁나는 경사진 산등성이 위에 우마차 두 대가 지나갈 정도의 넓은 벽돌 길을 내고 산 정상에 망루를 세운 일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

`호(胡)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진시황은 오랑캐들을 막고자 그 거대한 공사를 벌였다. 헌데 사실 호(胡)는 `오랑캐 호` 자(字)인 동시에 그의 어리석은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환관 조고(趙高)는 진시황이 천하주유 중에 죽자 유서를 조작해 여러 모로 뛰어난 첫째아들 부소를 자살하게 만들고, 어리석은 호해를 황제로 세운 뒤 국정을 농락했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시작이 결국 오늘날에는 후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유산이자 돈벌이 수단이 되게 해준 셈이다.

필자는 만리장성을 3차례 각기 다른 경로로 등정하면서 매번 중국의 저력을 되새기곤 했다. 그러나 북경이 필자에게 보여준 가장 놀랍고 값진 선물은 바로 우리 학과에 다니던 중국학생과 그들의 부모가 보여준 진심어린 마음이었다.

중국 제1의 연극학교인 중앙희극학원에서의 일정이 끝날 때마다 동료들과 함께 왕푸징 거리에서 전갈 튀김도 먹고 베이징덕도 맛봤지만 멀리 내몽고에서, 혹은 천진에서 불원천리 자식의 선생이라고 달려와 환대하던 중국 학부모들의 진심어린 환대는 북경에 대한 불평불만을 말끔히 씻고도 남았다.

특히 중국학생들이 모여서 젊음의 거리 산리툰에서 마련해준 근사한 식사대접보다 더 따스한 환대는 없을 것이다. 그 환대에 담긴 그들의 진정이 비록 정치적으로는 덜그럭거리는 한중관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믿음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국인들은 천지개벽이 나기 전에는 인생에서 꽌시(관계)의 중요성을 언제까지고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원기 청운대학교 연기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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