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흐르는그곳 골목길] ⑫ 예산 본정통

예산군 본정통은 과거 주민들의 행사 장소로 자주 쓰였다. 예산군 군민의날 행사에서 행진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예산군 본정통은 과거 주민들의 행사 장소로 자주 쓰였다. 예산군 군민의날 행사에서 행진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차가워진 공기에도 거리의 온기는 다소나마 남아 있다. 좁은 길목을 고즈넉히 둘러싼 낡은 건물들이 반갑기만 하다. 풍화된 간판에는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낡았다는 표현보다 고풍스럽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본정통(本町通). 본정(本町), 혹은 본통(本通)을 합친 단어다. 본정은 일본어로 `혼마찌`라고 부른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에 붙인 이름이다. 덕분에 본정통이라는 이름은 서울을 비롯해 전국 어디서라도 발견할 수 있다.

예산군 역시 본정통이 존재한다. 예산군청과 예산초등학교 사이에서 예산시장까지 일직선으로 뻗어난 도로 일대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예산 2리가 넓게 퍼져 있다. 각종 상점이 많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본정통은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지역의 중심이다. 일제시대 조성돼 지난 세기 중심 거리 역할을 해 온 본정통은 지금은 옷가게와 현대식 상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다만 현대식으로 바뀐 곳이 많아 보는 재미가 전만 못하다는 말도 더러 나온다.

때문에 본정통 기행은 인근 거리를 함께 둘러봐야만 비로소 맛이 산다. 여느 뒷골목이 그렇듯,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쉽게 옛 정취가 묻어나는 덕분이다.

주말, 예산읍 행정복지센터에서 짧은 여행을 시작한다. 센터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햇볕을 쬐는 노인 3명이 보인다. 인사를 건네니 반갑게 맞아준다. 비록 예산읍 토박이는 아니지만, 이들은 옛 본정통과 주변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한 노인이 손을 들어 본정통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준다. 그는 "본정통은 여기서 조금 더 가야혀"라며 "옛날 하고는 많이 바뀌긴 했는데 뒤쪽은 거의 그대로여. 뭔 일 있거나 하면 사람들이 엄청 몰렸어. 거기서 행렬도 하고 그랬지"라고 설명했다.

작별인사를 마친 뒤 노인이 가르쳐 준 방향을 따라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센터가 예산읍 예산1리에 속해 있으니 거리는 짧아도 나름 `행정구역을 넘는` 여정이다. 골목에는 상점이 많다. 예산읍의 경제적 중심지는 예산1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주민들의 연령대가 높은 탓인지 보청기 가게가 곳곳에 보인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지 않은 상점도 있다.

좁은 골목에 가지런히 늘어선 상점은 친숙하다. 길을 따라 걷다 고개를 들면 다양한 모습의 간판과 마주하게 된다. 현대식 간판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색이 바랜 것들도 눈에 띈다. 양복점, 공구점, 혹은 사진관 등이 그렇다. 원래 파란색이었을 것 같은 간판은 하늘색으로 바뀌어 있다. 세월을 직격으로 맞은 듯하다.

작지만 알차게 들어선 건물 틈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보인다. 아기자기한 모습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익숙한 만화 캐릭터부터 상상화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지역 청소년들이 이 일대에서 벽화그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하더니만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덕분에 낡았던 담벼락은 한폭의 그림이 됐다.

그림을 따라 들어가니 오래된 설비상점이 보인다. 사진자료나 TV드라마에서나 보일 법한 모습이다. 창문 틈으로 물건이 가득 쌓인 게 보였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발걸음을 돌리는 찰나 마침 주인장이 나타나더니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려 한다. 늦은 시간 여는 연유를 물어보자 그는 `더 이상 장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대신 그림을 따라 들어 온 관광객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가게 앞을 돌아다닌단다.

그는 "장사는 안 하고 있긴 하지만 벽화 사진을 찍으러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모습을 종종 본다"고 말한다. 고맙게도 "본정통은 돌아온 길을 따라 다시 오른쪽 길로 가면 나온다"고 알려준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온다. 앞발로 가게 문을 툭툭 건드리더니 이내 건물 옆으로 돌아 들어가 벌러덩 드러눕는다. 마을, 그리고 골목에 흐르는 여유를 한껏 느끼는 모양이다. 주인장 역시 원래 있었던 일인 양 심드렁하다. 유유자적한 모습이다.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걷고는 있지만 눈은 바쁘다. 점점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며 걷게된다. 길가에 놓인 낡은 표지판 하나도 놓치지 못하게 된다. 갈라진 담벼락이나 녹슨 처마 끝을 한참 들여다보게 된다. 그곳에 이미 역사가 있었다. 그곳에 시간이 녹아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본정통은 생각했던 것보다 번화한 모습이었다. 과거 집이었을 법한 건물에는 옷가게가 들어서 있다. 비포장이었을 도로는 깨끗이 포장돼 자동차가 지나다닌다. 저고리 대신 바람막이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다니듯, 단단한 콘크리트가 슬레이트와 기와를 대신한다.

지금은 이렇게 상점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사실 본정통이 속해 있는 예산읍 예산2리는 과거 교육과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조선시대 예산현의 관아가 예산초 부지에 있었던 덕분이다. 행정-교육의 맥이 이어진 곳인 만큼, 경제활동은 상권이 몰린 예산1리에 못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 중앙극장이 있었던 부근에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하고도 남았다.

지금은 다소 힘이 빠진 듯한 모양새다. 시대가 변하면서 추사거리쪽으로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일테다. 본정통은 이름으로나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주민들은 옛모습을 그리워한다. 식료품점 주인인 정모(56) 씨는 "상권이 많이 죽긴 했어요. 옛날에는 사람도 많고 가게도 많아서 엄청 많이들 찾았거든요"라며 "상가별 품목도 다양하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가게에 앞에서 만난 노신사의 목소리에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김정호(72)씨는 "옛날에는 사람도 참 많았어. 요즘은 다들 본정통에는 안 오더라구. 많이들 없어졌지 뭐"라며 "옛날하고 많이 바뀌었지. 요새는 가게가 다 현대식이야. 유명한 데도 많이 없어졌어"라고 말했다. 전통을 지키는 수준에서 리모델링을 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

길을 건너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간다. 다시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건물 사이 사이에 세월이 녹아 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본정통 기행은 역시 주변 골목을 뒤져봐야만 제맛이 난다.

길을 걷다 문득 본정통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지금은 약해졌지만 어쨌든 여전히 `예산읍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시끌벅적한 모임이 열렸던 곳. 굽이굽이마다 발견되는 낡은 흔적에 세월이 서려있는 곳.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겠지만 본정통에 대한 공통된 정서는 분명히 존재한다. 과거에도 지금도 한결같이 사람들을 껴안는 곳. 비록 지금은 미약해졌지만, 바로 그것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본정통의 명맥이 유지되는 이유일 것이다. 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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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본정통에 위치한 예산문화원의 1960년 모습.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예산군 본정통에 위치한 예산문화원의 1960년 모습.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예산군 본정통에 위치했던 예산문화원의 과거 모습.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예산군 본정통에 위치했던 예산문화원의 과거 모습.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예산군 본정통 인근 골목길 곳곳에서 낡은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전희진 기자
예산군 본정통 인근 골목길 곳곳에서 낡은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전희진 기자
예산군 본정통은 현재 다양한 상점이 위치한 상가 거리로 바뀌었다. 전희진 기자
예산군 본정통은 현재 다양한 상점이 위치한 상가 거리로 바뀌었다. 전희진 기자
예산군 본정통은 인근 골목길을 구석구석 누벼야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전희진 기자
예산군 본정통은 인근 골목길을 구석구석 누벼야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전희진 기자
예산군 본정통 인근 골목길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희진 기자
예산군 본정통 인근 골목길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희진 기자
본정통 인근 골목길에는 낡았지만 멋스러운 건물이 곳곳에 위치해 있다. 전희진 기자
본정통 인근 골목길에는 낡았지만 멋스러운 건물이 곳곳에 위치해 있다. 전희진 기자
1931년 예산읍내 전경.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1931년 예산읍내 전경. 사진=예산문화원 제공

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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