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아이의 유치원 발표회서 겪은 일이다. 한해동안 유치원에서 갈고 닦은 아이들 재롱과 솜씨를 보러 온 이들로 행사장은 입추의 여지 없이 꽉 찼다. 먼저 온 사람들이 많아 뒤편에 앉았다. 객석이 무대를 향해 전체적으로 경사가 있어 뒤쪽이라도 공연을 조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순진한 기대였다.

무대의 막이 걷히고 아이들 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은 난데없이 피켓 경연장이 됐다. 알록달록 형형색색에 재기발랄한 문구들로 도배된 피켓들은 공연에 등장하는 아이를 응원하기 위해 가족들이 준비해 온 것이었다. 자기 자식 응원하는데,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머리 위로 솟은 피켓들 때문에 시야가 막혀 난감했다. 뒷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피켓을 내려 달라는 진행자의 안내 멘트가 반복됐지만 피켓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앞에 앉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엄마, 아빠들은 피켓도 만들어와 흔드는데 우리 가족은 뭐야? 피켓도 없고. 다른 친구들이 무지 부러웠다"고.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해 피켓 공포는 완화됐지만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피켓들과 직면하게 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각급 학교나 동문회 등에서 내 건 특정학교 합격 홍보물 게시관행이 학벌 차별문화를 조성한다며 2012년 10월 전국 시·도교육감에게 지도· 감독을 요청했다. 인권위원회 자제 요구에도 특정학교 합격 홍보 현수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즘은 특정학교 합격 뿐 아니라 특정직장 취업 축하 현수막까지 보편화 됐다. 어느 실업계 고교 정문 옆은 공기업이나 금융기관, 공무원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즐비하다.

합격의 당사자야 취업의 환희에 현수막까지 등장하니 기쁨이 배가 되겠지만 취준생의 길로 접어든 다른 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다른 청소년들에게도 그 현수막이 즐거움을 선사할까. 특정학교 합격 현수막이 학벌 차별문화를 부추기듯 특정직장 합격 현수막은 직업의 차별문화를 심화시킨다. 한 명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당당히 열패감을 안겨주는 합격 현수막. 사회는 더 넓어진 유치원 발표회장이었다. 윤평호 천안아산취재본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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