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4년 정몽주가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올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며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국교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는데 친원파들은 정몽주를 제거할 요량으로 그를 추천했다.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더구나 명 태조의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물한국사).

정몽주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나태`와 `참여(Participation)`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관대하며 집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면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보상하려 한다. 너그럽고 이타적이며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고자 한다. 열심히 일할 때에는 자신의 고통은 돌보지 않고 스트레스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집단 내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1337년(충숙왕 복위 6년)에 태어난 정몽주는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362년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예문관 하위직 시절에는 김득배가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하고서도 김용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김득배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신을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를 지냈을 만큼 대단한 배짱을 보였다. 자칫하면 역도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다(인물한국사).

그는 관료로서 옳다고 판단되는 일에 대하여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속으로 치고 들어갔고 추진력을 발휘했다. 그의 태도는 일관성이 있었으며 남들이 꺼려하는 일에 대해서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맡아 완수해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는 뜻을 같이하며 공신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고려의 개혁에 대하여는 찬성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정몽주는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와병중일 때 그를 제거함으로써 고려의 사직을 보존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이로써 고려의 운명은 끝이 났다.

역사를 가정함은 허망한 일이지만 9번 유형인 정몽주의 우직한 힘에 민첩성이 어우러졌다면 고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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