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이 불분명한 분노로 인해 저질러진 사건사고들을 일일이 여기에 나열하는 건 무의미하게 생각된다. 어디든 언론매체에 접속만 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게 이런 사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 진부해 보이더라도 원론적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앞서 `고통의 뿌리`(11월 3일자 게재)에서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서의 생존을 얘기한 바 있다. 이 구조는 생존 자체가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누군가를 먹어야 살 수 있다면 나 또한 언제든 먹힐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다른 동물에 비해 인지능력이 월등하게 좋아진(일명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혁명) 인간들은 먹이사슬의 맨 윗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먹고 먹히는 구조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자 인간 특유의 문명이라는 걸 만들어 냈다. 종교와 예술, 인문, 철학처럼 인간만이 누리는 문명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전혀 다른 존재로까지 승화시켰다. 하지만 기나긴 생명 진화의 과정에서 공고화된 긴장과 공격성은, 더욱 치밀하고 무분별한 폭력성으로 변형되어 인류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들을 남기고 있다.

그러면 초고속의 과학발전을 기반으로 가파르게 외형적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그 긴장과 공격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오랫동안 우리에게 강력한 정서적 지지 기반이었던 가정과 마을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면서 인류는 점점 개별화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생존 자체가 야기하는 긴장과 불안은 물론 끝없는 경쟁이 만들어내는 극도의 스트레스까지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되었다. 자신의 삶이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경험하는 좌절과 소외는 이제 일부 특정인의 몫이 아니다. 보상 받을 길 없는 좌절과 소외가 각 개인의 가슴속에 폭발하기 직전의 분노로 쌓여가고 있다면,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실수를 절대 저지르지 않는 다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누가 공격자가 되고 누가 피해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내 집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지키는 심정으로 가슴속 폭탄의 안부를 묻고, 내 통장에 쌓이는 저축이 다른 누군가의 가슴에 폭탄을 가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때다. 이예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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