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날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일협약안` 강제 체결 음모는 고종과 대신들에 대한 반복되는 협박과 회유 끝에 11월 17일 `을사오적`의 동의로 마침내 종결되었다.

고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피암시성`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근심 걱정이 없는 즐거운 사람들이다. 이상적이며 다소 순진하기도 하다. 현실을 미화하고 세상을 실제 모습보다 좋게 본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자 하며, 낙관적인 태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정보에 집착한다. 삶의 지루함을 잊고자 특정 대상에 열광하기도 한다.

1852년 흥선군 이하응의 차자로 태어난 고종은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11세에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고종은 종친 내 서열상으로는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자 했던 대왕대비 조씨와 파락호 노릇을 하며 기회를 엿보던 흥선군의 정치적 입장이 맞았기 때문에 효명세자와 대왕대비 조씨의 양자로 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와 같은 배경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이기도 했지만 고종의 재위 초기 10년 간은 흥선대원군이 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군은 에니어그램 8번 성격유형답게 권력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다.

흥선군의 대리정치 이후 이번에는 권력의 중심이 명성황후에게로 옮겨갔다. 흥선대원군이 외척의 세도를 피하고자 몰락한 집안의 규수를 골라 며느리로 삼았던 민비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도 8번이었다. 사기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도 흥선군 못지않게 권력 의지가 강했으므로 두 사람은 부딪쳤고 고종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임금의 책무에 몰두하기보다는 낙관적인 상상 속에 머물렀다. 당시의 복잡한 국내·외 정치상황이 7번 성격유형인 그가 감내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런 것이기도 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은 놀기를 좋아하여 친정 이후 매일 밤이 되면 잔치를 베풀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며 밤낮이 바뀐 이유가 노는 습성 때문이라고 적었다"(이덕일, 2010).

1895년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고종이 전 상궁 엄씨를 입궁시킨 것에 대하여,"`매천야록`은 `민후의 시해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째 되는 날이었는데, 임금이 이처럼 중심이 없었으므로 도성 사람들은 모두 한탄했다`고 기록했다"(이덕일, 2010).

1863년에 왕위에 오른 고종의 치세는 44년 간 이어졌고 이 기간에 조선은 망국의 길로 갔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도 비운의 군주 또는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엇갈리지만, 현실의 고통을 애써 잊고자 하는 `탐닉`이라는 격정을 가진 7번 유형들은 어떻게 자신을 통찰하고 극복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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