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분디나무로 깎은, 아, 소반의 젓가락 같구나. 님의 앞에 들어 가지런히 놓으니, 손님이 가져가는구나. 아으 동동다리…."

우리나라 최초의 달거리 노래로 고려시대에 구전되다가 조선의 악학궤범에 한글체로 소개돼 있는 `동동`의 일부분이다. 고려의 여인이 삶의 고단함과 사랑 이야기를 월령체 형식으로 노래한 것인데 세시풍습에서부터 자연환경과 시대적 자화상을 엿볼 수 있는 우리 문학의 보석 같은 작품이다. 소반 위에 음식과 함께 젓가락을 올려놓고 기다렸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오지 않고 엉뚱한 사람이 먹고 갔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루지 못한 사랑과 뜻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집가는 비련의 여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다가옴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분디나무는 산초(山椒)나무다. 세계 3대 광천수 중의 하나로 알려진 초정약수의 초(椒)가 바로 산초나무를 뜻한다. 산초나무와 초정약수는 똑 쏘고 알싸한 맛이 유사하다. 우리 지역 야산에 대량으로 자생하고 있는데 10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분디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했고, 분디나무 잎으로 장아찌를 해 먹었으며, 분디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귀한 음식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항독성이 뛰어나 약용으로도 애용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미가 못나서 너를 지키지 못했구나. 부디 저승에 가서라도 굶지 말고 건강해야 한다. 공부 열심히 하고 부자 되거라. 행복하거라. 네가 이승에서 겪었던 모든 아픔들을 흐르는 물살에 풀어 놓거라. 어미는 너를 가슴에 묻었다."

고려 말로 추정되는 청주 명암동 무덤에서 쇠젓가락과 동전과 먹이 출토됐다. 신기하게도 가늘고 긴 쇠젓가락에는 `齊肅公妻 造○世亡子`라는 작은 글씨가 점각되어 있었다. 제숙공의 부인이 일찍 죽은 아들에게 저승에 가서라도 굶지 말라며 젓가락을, 부자 되라며 동전을, 열심히 공부하라며 먹을 묻은 것이다. 이 중 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단산오옥(丹山烏玉)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젓가락이라는 작은 도구 하나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잠자고 있던 우리 조상의 사랑과 아픔과 삶의 애잔함을 만나게 되고 당시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국립청주박물관에만 수저유물이 1300여 점 있다. 청주권 대학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까지 더하면 5000여 점에 달할 것이다. 일찍이 청주지역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비롯해 금속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수저를 함께 묻었기 때문이다.

이 많은 유물 속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다. 나라가 망해도 문화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사람이 죽어도 그 삶의 흔적은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묵상한다.

생명문화도시 청주와 젓가락은 운명같은 존재다. 소로리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출토됐다. 비옥한 청원 땅에서는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쏟아지는 생명쌀이 있다. 젓가락 없으면 군침만 흘려야 하는 청주삼겹살도 나라 안팎에서 인기다.

청주가 교육도시, 충절의 도시의 명맥을 이어오고 청주농악을 비롯해 전통과 현대의 다양한 공연콘텐츠도 젓가락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중일 3국이 1000년 넘도록 함께 사용해온 도구는 오직 하나. 젓가락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했던가. 어머니 젖을 뗀 후 젓가락질을 배우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젓가락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손가락, 발가락, 숟가락, 젓가락 등 이 모든 것이 내 몸이나 다름없다. 특히 한국은 숟가락까지 사용하고 있으며 내세에 대한 믿음 때문에 부장품으로까지 사용됐다. 식문화 뿐만 아니라 교육, 공예, 바느질, 공연, 스포츠, IT, 의술, 자동차와 조선업 등 손재주와 관련해서는 세계 으뜸인 것도 젓가락문화 유전자 때문이다.

11월 10일부터 옛 청주연초제조창에서 젓가락페스티벌이 열린다. 젓가락유전자로 문화를 담자, 미래를 열자.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