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훈 소설가
이예훈 소설가
사는 건 어차피 고통이야. 우리는 보통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습관처럼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그래도 사는 게 온통 고통뿐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살다 보면 즐겁고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고 사는 게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행로에 동전의 뒷면처럼 맞붙어 있는 갈등과 두려움 분노와 회한.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병마와 노화 무엇보다도 죽음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고통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기독교에서는 고통의 시작을 원죄에 둔다. 신이 허락하지 않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해서 고통과 죽음은 시작되었다고. 기독교에서의 해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다. 영화에서 본 장면이긴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허공에 매달려있는 예수는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군중들의 내려다보면서 고통스럽게 간구한다. 저들을 용서하라고,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저들이 모르고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용서하시라고. 그런가 하면 붓다는 십이연기에서 생명의 시작 맨 앞에 아예 `무명`을 둔다. 모름으로 해서 태어나는 존재들. 그것이 중생 즉 생명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 오로지 생을 향한 욕망과 집착에 이끌려 생로병사를 반복하는 존재들. 그 중생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고통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붓다는 집착을 놓으라고 당부한다. 어떻게?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주문이다. 그러기엔 생존은 집착과 너무 깊이 밀착되어 있다. 거의 한 몸처럼 보일 만큼. 그 해법으로 붓다는 `알아차리라`고 속삭인다. 네가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너를 끌고 가고 있는지. 끌려가는 것, 끌고 가는 것이 진짜 너인지. 정말, 나는 무엇에 이끌려가고 있는가?

생명체는 죽음으로서 사는 존재이다. 우리들 몸의 세포가 매초마다 수억 개씩 죽고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세포가 암덩어리가 된다. 맹목적인 집착이 내 삶을 암덩어리로 만드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예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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