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 마을의 유래

공세리는 아산군 현내면과 일서면의 접경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흥면(전 수원부 가사면 지역)의 서강리, 하신원리와 현내면의 동강리 일부를 병합해 공세리라 하고 인주면에 편입됐다. 공세리는 아산만 방조제와 삽교천 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전형적인 어촌의 형태를 띠기도 했었다. 특히 이 지역은 아산만 방조제로 인해 서해대교가 연결되기 전까지는 바다를 가로질러 경기도와 충남을 연결하는 유일한 곳으로 충남의 관문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공세리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에 공세창(公稅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조선시대 당시 충청도 서남부인 아산·서산·한산·연산·보령·신창·직산·홍산·청주·옥천·회인 등 40개 지역에서 거둬들인 조세를 보관했던 곳이다. 아산·서산·청주 등 충청도 서남부 예당평야에서 생산한 곡물이 이곳 공세창에 모인 다음 배에 실려 한양으로 운송됐다. 물자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신문물의 유입도 빨랐다. 처음에는 창고가 없었으나 중종 18년(1523년)에 80칸 규모의 창고가 지어졌고 공세곶창을 공진창이라 개칭해 불렀다. 그러나 영조 38면(1762년) 해운창 제도가 폐지도면서 아산현감의 관리로 격하되고 고종 2년(1865년) 조창제가 폐지되면서 방치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청주교 성당과 민가가 들어섰고 성벽은 동남쪽에 남아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됐다. 공세창이 있던 자리가 현재 공세리성당 자리라고 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일대는 한국 최초로 천주교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한국 천주교가 창설된 지역이다. 그 결과 많은 공소가 생겼는데 공세리 역시 초기 공소가 있었던 곳이다. 1895년 프랑스에서 온 에밀리오 드비즈 신부에 의해 공세리성당이 설립됐다. 공세리는 조창에 의한 육운과 해운 번창하고 고려 후기에는 몽고의 침략을 인주지역이 3차 침략을 받았다. 고려말에는 왜구들이 아산만을 통해 5차례 침입을 한 바 있다. 청일전쟁 때에는 청나라 군사가 아산만으로 상륙해 일본군과 격절을 벌이기도 했다. 해운이 발달해 조창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연락부절하고 물화의 유통이 번성하였던 포천이었다. 공세리는 공세창이 있어 공세지, 공세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황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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