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자랑스런 예술이다. 명창이 고수 한 사람의 북장단만으로 긴 이야기를 노래로 엮어가는 일인극 형태이다.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서사시의 전통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나 형태는 다르지만 다양하게 존재하였다. 가까운 중국의 강창극과 일본의 노오 등처럼 이야기를 극 양식으로 꾸며내는 예술 형태는 나라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였던 것 같다.

우리의 판소리는 이야기의 전통을 물려받은 광대, 소리꾼들이 이전 시기와는 다른 특별한 창법과 장단을 개발하여 실감나고 재미있게 긴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판소리를 부르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소리꾼이라고 부른다. 노래 외에 여러 가지 재주나 기예를 가진 사람을 광대라고 아울러 부른다면, 소리꾼은 노래를 특히 잘 부르고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이른다. 소리꾼을 예전에는 가객이라고도 하였으나, 판소리를 직업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주로 소리꾼이라 하였고, 그 중 특별히 잘 하는 사람들에게는 명창이라는 명예를 주었다.

소리꾼은 부채 하나를 들고 춘향이가 되었다, 방자가 되었다, 암행어사가 되었다를 넘나들기도 하고, 다시 소리꾼이 되어 이야기 전달자가 되기도 하면서 판소리를 이어간다. 여기에 반주는 북을 교묘히 잘 치는 고수 한 명뿐이다. 화려한 악기도, 무대 배경도 없이 돗자리에 방석하나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고수는 소리꾼의 상대역이 되기도 하고, 소리의 흥을 넣어주기도 하고, 명창들 소리를 더 잘하도록 연출자 역할도 하는 일인 다역 역할을 한다.

이렇게 소리를 한 바탕 벌이면 사람들은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예전에는 서민들이 볼 수 있는 공연예술이란 사당패, 관노가면극, 무당굿 등이 전부였기 때문에 판소리는 일찍부터 많은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문학적 음악적 발전을 이루며 300여 년 그 전승을 이어왔다. 판소리의 전승은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구비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 연행 내용이 수시로 유동적으로 바뀐다. 그러다 보니 스승의 소리와 제자의 소리가 다르기 일쑤이고, 같은 소리꾼이 부른다 하여도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 있다. 인기 있는 좋은 소리가 있으면 따와서 내 소리로 삼기도 하였고, 열심히 독공을 하여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3세기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오면서 판소리는 풍부한 사설과 고도의 음악성, 세련된 예술성을 가진 문화유산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판소리가 어떻게 발생되었을까 하는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구구한 해석이 많다. 그 중 최초의 판소리 이론서라 할 수 있는 <조선창극사>는 판소리의 기원과 200여 명의 명창에 대한 구전과 약력 등을 기록한 책인데, 이 책에는 최초의 명창으로 최선달과 하한담이 기록되어 있다. 광대들이 소리풀이라고 하는 노래를 하면서 선배 명창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에 최선달과 하한담을 판소리의 시조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 중 최선달은 결성(홍성군) 사람, 하한담은 목천(천안시) 사람이라는 정도만 그간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최선달이 결성에서 대대로 살아온 해주 최씨 가문 25세손으로 본명은 최예운(崔禮雲)으로 1726-1805년 생존하던 실존인물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게다가 당시 명창으로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판소리 발생기 최초의 명창은 물론 20세기 전반까지 충청지역에는 30여 명의 명창들이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활약했다. 이들은 서산·홍성·서천·공주·논산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며 인기를 누렸는데, 염계달·고수관·방만춘·정춘풍·한성준·김정근·김창룡·이동백·심정순·황호통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불렀던 충청도 판소리인 중고제를 중심으로 점차 판소리의 유파가 발생하고 동, 서편이 생겨 그 음악이 번성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동진 명창은 바로 이러한 충청도 명창의 마지막 주자였다.

이처럼 충청도는 판소리의 발생지요,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의 명성에 비해 현재 판소리는 그 위상이나 향유층이 매우 위축되어 있다. 그것은 20세기 이후 판소리가 전라도 중심의 미학으로 그 중심이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를 즐기는 우리 지역의 문화적 태도는 전라도나 경상도의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충청도는 대대로 양반의 고장이며, 위로는 경기도, 아래로는 전라도와 인접하여 다양한 지역의 문화예술이 모이는 집산지이자 접변지 역할을 했다. 충청도의 민요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의 특유의 음악적 어법을 골고루 다양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이것을 증명한다.

그러나보니 충청도의 판소리는 시조나 가사, 가곡 같은 양반층의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고, 담담하고 담백하게 소리를 내다가 호령하는 형식으로 마디를 강조하는 특유의 판소리적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최선달은 양반층에서 탄생한 비가비 소리광대로, 그가 가진 양반적 특색이 판소리를 태어나게 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중고제 판소리는 경기 북부권과 이북 지역에서도 크게 호응을 받아서 일제강점기에는 중고제 명창들이 북쪽 지역 순회 공연에서도 큰 호응을 받았었다. 현재는 판소리가 전라도를 중심으로 그 미감이 치우쳐있기 때문에 고른 판소리의 확산과 전승을 위해서는 다양한 지역 미학을 포함한 판소리가 향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충청도 판소리 곧 중고제 소리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지역의 정서와 미감을 드러낼 수 있는 충청소리 중고제가 우리 지역민들에게 자신의 옷처럼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판소리 광대는 물론 판소리 발생기에 많은 명창을 배출한 충청, 특히 충남지역은 누가 뭐라 해도 판소리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가 주는 탁월한 문학성과 음악성으로 전세계인은 감동하고 열광한다. 판소리의 발생지역인 충청도민들이 우리가 가진 위대한 문화유산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충청도 판소리, 중고제 판소리의 유산을 확인해볼 일이다. 최혜진 목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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